채수정 등 고정간첩 7개 망 30명 검거
崔錫元(최석원) 치안국장은 6일 오전 9시 북괴 거물 여간첩 蔡洙貞(채수정·49)과 蔡의 지령을 받고 서울·大田(대전)·全州(전주) 등지를 거점으로 암약 중이던 고정간첩 7개 망 一黨(일당) 30명을 지난 4월 모두 검거했다고 發表(발표)했다.
崔 치안국장은 이날 오전 9시 記者會見(기자회견)을 通(통)해 警察(경찰)에 檢擧(검거)된 女間諜(여간첩) 蔡洙貞은 ‘조선여성동맹’ 平壤(평양)시 책임지도원으로서 북괴의 개성정치경제대학을 졸업, 間諜 養成機關(양성기관)인 ‘695’ 및 ‘940’ 軍部隊(군부대)에서 2년 10개월 동안 間諜密封敎育(간첩밀봉교육)을 받고 지난 71년 10월, 73년 11월, 금년 2월 등 세 차례나 南派(남파)되었던 巨物級(거물급) 間諜으로서 金日成(김일성)으로부터 북괴 最高勳章(최고훈장)인 국기훈장 1급을 받은 자라고 밝혔다.
崔 국장은 간첩 蔡는 북괴 노동당 대남사업총책 金중민의 南韓(남한) 政府(정부) 전복지령을 직접 받고 지난 2월 16일 남파, 그동안 자기 지령 하에 서울·全州·大田 등지에서 暗躍(암약) 중이던 固定間諜(고정간첩) 7개망 대표 鄭哲雨(정철우·36), 신창길(58), 신창호(45), 장성순(37), 宋(송)효섭(55), 宋재광(35). 蔡수비(43) 등의 간첩활동 상황을 독찰점검하여 반정부 세력을 확대, 3·4월 危機設(위기설)에 따른 社會混亂(사회혼란)을 조성, 결정적인 시기에 일제히 蜂起(봉기), 現(현) 政府를 전복하려는 計劃(계획)이었다고 말했다. (하략) <8984호·1974년 5월 7일자 1면>
1970년대엔 왜 그리 간첩이 많았는지 모르겠다. 툭 하면 신문과 방송 톱뉴스를 통해 남파간첩과 고정간첩을 일망타진했다는 등의 소식이 전해지곤 했다. 여기엔 실제로 북에서 내려와 암약하던 간첩들도 있었지만, 억울하게 용공분자니 간첩이니 하는 누명을 쓰고 고초를 겪어야 했던 민주화 인사들 또한 적지 않았다. 본 란에서 다뤘던 민청학련 사건이 그랬고, 박정희 정권의 ‘사법살인’으로 기록된 인혁당 재건위의 비극 등이 그랬다.
기사에 등장하는 여간첩 채수정은 통일 혁명당 재건 나섰던 인물이었다.
1974년 검거돼 법정에 선 그는 1975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고, 1976년 51세의 나이로 사형이 집행됐다. 1974년 5월 6일 내무부 치안국(현 경찰청)은 채수정을 비롯해 고정 간첩 7개 망 30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하면서 이들로부터 공작금 90만4700원(공작비 사용 잔여 액), 권총 2정, 실탄 51발, 무전기 4대, 난수표 3조, 통신 조직표 3조, 약어 표 3조, 나침반 1개, 위조 주민등록증 3장, 독약 2병, 불온 책자 등 증거물 100여점을 압수했다고 밝혔다.
채수정은 1925년 8월 26일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1944년 이순팔과 결혼해 1945년 2월 함경남도 흥남으로 이주한 뒤 남편이 6·25전쟁에서 전사하자 그 덕분에 함경북도 나남시 중앙리 여맹위원장(1954년), 평양시 여맹 책임 지부원(1958년)을 맡았고, 1968년 2월 간첩부서인 중앙당 연락부에 소환돼 간첩 양성소인 695부대와 940부대에서 3년 간 공작원 전문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졌다. 채수정이 검거된 것은 우연히 대전역 앞에서 열린 ‘북괴 만행 규탄대회’를 지켜보다, 김일성을 규탄하고 화형식을 하는 장면에 흥분한 나머지 하숙집에 돌아와 화를 냈고, 이를 수상히 여긴 하숙집 주인의 신고로 체포됐다고 한다. 거물급 간첩 치고는 코미디 같은 결말이었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