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암살 배후서 조종
고 白凡(백범) 金九(김구) 선생의 암살 사건은 安斗熙(안두희)의 단독범행이 아니라 배후가 있는 계획적인 범행이었음이 白凡 사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白凡 암살 음모에 직접 가담했던 행동대원 10명 중의 하나인 洪鍾萬(홍종만)씨(55·당시 한독당태평양지구위원장)가 지난 12일 동아일보에 그 범행 전모를 밝힘으로써 드러난 것이다.
洪씨는 당시 白凡이 이끄는 한독당원으로 있으면서 白凡 살해범인 安斗熙(당시 육군 포병 소위)를 입당시킨 인물이다.
洪씨는 白凡 암살의 진상을 낱낱이 털어놓으면서 “지금까지 항상 죄의식 속에서 살아왔다”고 말하고 “법적인 시효는 지났어도 양심의 시효는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다고 뉘우쳐 白凡 선생의 영전과 국민 앞에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진상을 폭로한다”고 말했다.
洪씨는 金九 선생의 암살을 배후에서 직접 조종한 인물은 당시 포병사령관 張銀山(장은산) 중령(사망)이었으며 그 밑에 각본을 꾸민 거물급 정치 브로커 金志雄(김지웅·현재 日本(일본) 체류 중) 그리고 安斗熙와 자신을 포함한 10명의 행동대원이 있었다고 말했다.
洪씨는 또 “당시 일부 정치인과 申(신)모 장관도 이 사건에 깊이 관여돼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하략) <8993호·1974년 5월 17일자 3면>
1949년 6월 26일 오후 백범 김구 선생은 자택인 서울 경교장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 시각 경교장에 김구 선생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이자 김구 선생이 이끌던 한국독립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였다. 비서진들은 아무런 검문이나 경계 없이 안두희를 김구 선생이 있는 서재로 보냈다. 안두희의 허리춤에 권총이 들어 있었지만 군인이라는 이유로 검문이나 제지 없이 통과시켰다.
김구 앞에 나타난 안두희는 “선생님, 먹을 갈아 드릴까요?”라고 묻고 고개를 돌려 그를 보려는 김구 선생을 향해 미국제 권총을 꺼내들어 1m 거리에서 4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김구 선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서거했다.
안두희는 경교장을 빠져나가다가 경교장 경비들에게 잡혀 헌병사령부로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그는 김구가 남북 협상을 통해서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키고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결국엔 참다 못해 김구를 죽였다고 진술했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됐으나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됐다.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시켜 군에 복귀시켰고 계급을 오히려 소위에서 소령으로 특진시켰다. 안두희는 재판 중 2계급 특진을 했고 사건으로부터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예편 후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군으로 건너가 군납공장을 차려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면서 정권의 비호로 대저택까지 지어 살았다고 한다. 배후설이 생기게 된 이유다.
그러나 결국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자택에서 버스기사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에 두들겨 맞아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