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사람이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남들이 깨우치게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군자는 그냥 식자(識者)나 학자(學者)와는 다르다. 군자(君子)는 학문에 통달한 사람이 아니라 인생에 통달한 사람이다. 이러한 군자로서 선비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러한가? 먼저 자신부터 사람이 되어 있어야 남들이 사람이 되게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선 강하면 살아남고 약하면 죽는다. 사슴들의 세계에선 숫놈이 암놈을 거느리려면 힘이 강해야한다. 약한 숫놈들은 홀 애비가 되어 멀리서 암컷을 독차지한 강한 놈에게 도전하기 위하여 열심히 뿔을 갈면서 힘이 강해질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때가 되면 피나는 뿔싸움을 벌여 이기게 되면 암컷들을 모조리 독차지 한다. 이것이 사슴이란 동물사회의 윤리이다. 사람들의 윤리가 이러하다면 사람이라는 동물사회는 하루도 지탱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짐승과 다르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인륜이다. 도마뱀은 위기에 몰리면 꼬리를 잘라주고 목숨을 건진다. 새가 날면 달팽이는 집속으로 몸을 감추고, 풀 섶에 사는 여치는 풀잎의 색깔을 따라 피부의 빛깔을 갈아서 목숨을 부지한다. 이렇게 사람이 아닌 동물들은 저마다 목숨을 위해서 하나 정도의 지혜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수많은 지혜를 지니고 나누면서 산다.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 사람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얼마나 뜻있게 하느냐에 관심을 둔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에 빈대가 남아나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소인배가 벼슬아치가 되면 권세가 돈벌이를 하는 물건처럼 되어 관청이 마치 장터처럼 되고 만다.
우리는 왜 서울시청을 복마전이라고 비웃는가? 서울시청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은 이 말을 뼈아프게 새겨야 할 것이다. 군자다운 관리보다 소인배의 관리가 더 많다는 백성의 원망임을 알아들어야 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정직하게 일을 처리 하라고 명하면 아래쪽에서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않느냐고 투덜대면 세상은 썩는 것이다. 항상 백성이 못나서 세상이 썩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선비류가 못나서 세상은 썩고 문들어지는 법이다. 이럴 때 서양 사람들은 말세라 했고 우리는 난세(難世)라 했다.
난세가 사라진 적이 없다. 항상 세상은 군자(君子)의 말씀보다는 소인배의 말이 기승을 부리는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 산다. 군자를 기다리는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은 소인배들이 득실거리는 장터 같기 때문이다. 소인들의 장난탓으로 세상은 옹색해지고 마치 투전판처럼 돌아가고 있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