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감찬 장군 출생 유적지 낙성대 준공

고려명장 姜邯贊(강감찬) 장군의 출생 유적지인 落星垈(낙성대)가 새로 조성돼 10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양택식 서울시장 등 많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됐다.

落星垈는 작년 118일 착공, 7개월 만에 완공됐는데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대지 30만평의 자연공원으로 돼있다.

45천여 만원의 예산이 투입된 조성공사에는 安國祠(안국사) 영정, 사전비, 3층석탑 등 조경 및 휴식 등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서울시는 낙성대 입장료를 어른 30, 어린이 10원으로 정했다. <9015·1974612일자 1>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의 탄생 설화와 관련이 있다. 강감찬이 태어날 때 문곡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게 그것이다. 별이 떨어진 터, ‘낙성대라는 이름은 그런 연유로 지어졌다.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강감찬은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한데다 용모 또한 볼품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사는 그에 대해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신통한 지략이 많았다고 전한다.

한 번은 작은 고을의 원님이 된 나이 어린 강감찬을 당시 아전과 향리들이 비웃고 무시했다.

그러자 강감찬은 이들을 불러 모아 동헌 뜰의 수수를 가리키며 저기 수숫대를 모두 그대들 소매에 넣어 보라고 명령했다. 수숫대가 사람 소매에 들어갈 리는 없는 일. 그러자 강감찬은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넣지 못하면서 감히 20년도 넘게 자란 나를 소매 안에 넣고 흔들려 했느냐라고 일갈 했다고 한다.

강감찬의 출생은 948(정종 3), 1032(덕종 1) ()했다.

우리 역사의 ‘3대 대첩(大捷)’으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이순신의 한산대첩, 그리고 강감찬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을 꼽는다. 귀주대첩은 고려 현종 10(1019)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맞아 귀주에서 섬멸한,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전사(戰史).

그래서 강감찬을 무신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그는 지략이 뛰어난 문신이었다.

거란이 2차 침입 당시 퇴각하면서 내건 화의 조건은 두 가지였다. 고려 왕이 거란으로 입조하라는 것과, 강동 6주를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종은 칭병하며 거란에 가지 않았고, 강동 6주 또한 돌려주지 않았다. 1018(현종 9)에 소배압을 대장으로 하는 10만 대군이 다시 대대적으로 고려를 침략했는데, 이것이 거란의 3차 침입이다.

이때엔 고려도 국방을 튼튼히 하며 단단히 준비했다. 국경의 수비를 한층 강화했고, 20만 군대를 양성했다. 3차 침입이 일어나자 현종은 20만 대군을 이끌 상원수로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있던 강감찬을 임명했다.

흥화진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강감찬은 회군하는 거란군과 전면전을 벌이게 되는데, 그것이 귀주대첩이다. 귀주는 압록강 이남 청천강 이북에 있는 강동 6주의 하나였다. 뒤쫓는 고려군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지만, 거란군 역시 물러날 길 없는 막판 전투였다. 그리고 강감찬은 사활을 건 대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생포한 인원과 노획한 말, 낙타, 갑옷과 투구 같은 병기들이 수없이 많았고, 살아 돌아간 적병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 아시아의 맹주로 만주와 중원을 호령하던 거란군이 가장 끔찍하게 당한 패배였다./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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