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아이가 ‘SOS’를 보내왔다. 3000만원이 더 필요한데 마련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올 4월 개점한 업장의 인테리어 비용이 지출 예상 금액을 훌쩍 뛰어넘어 부득이 자금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신용보증으로 3000만원을 대출 받았던 터였기에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과정이 까다롭고 복잡하다. 또 제출해야 할 서류는 왜 그리 많은지.
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 소득금액증명원, 전입세대열람내역, 국세·지방세납세증명서 등등. 주택 공동소유자인 아내까지 합치면 13개나 됐다. 문제는 주민등록상 동일 거주 자녀에 대한 무주택조회동의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둘째와 셋째 아이가 호주에 가 있다는 것이 걸림돌이었다. 여차저차 진행하고는 있는데, 참 세상일 쉬운 게 없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는 아이
큰딸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 장난기 섞인 질문을 했다.
“어이 큰딸, 너희 학교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그러자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
그 아인 그렇게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 자신감이 제 삶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게 했고, 나름대로 잘 살고 있다.
이제 서른이 된 그 아이에게 올해 두 가지 좋은 일이 있었다.
첫 번째는, 아이가 졸업한 대학 겸임교수로 임명된 것이다. 학과장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대학교수’라는 명함을 받을 수 있게 됐는데, 자기 수강생들의 호응이 높다고 자화자찬이다. 얼마 전 종강하면서 같이 소고기를 먹었다.
두 번째는, 앞서 말한 것처럼 지난 4월에 매장을 연 것이다. 동탄신도시 여울공원 인근인데, 주변 환경과 목이 좋다. 서울과 다름없는 번화가로, 1~2층엔 농협과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다.
아이의 3층 매장 규모는 100평. 월세만 해도 1200만원이라고 한다. 손이 큰 아이라는 건 알았지만, 참 시원시원하게 일을 벌인다. 인테리어 비용이 4억원 가까이 이르는 바람에 당초 계획이 틀어졌고, 그래서 도움을 요청해 왔던 것이다.
주택담보로 대출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자 큰딸아이는 “나 때문에 아빠가… 속상해 죽겠어”라며 “내가 한 번 구해볼래”라고 말을 바꿨다.
고스란히 돌려받은 아버지라는 이름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할 때 아버지는 내 등록금을 빌리기 위해 형의 가게로 갔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형의 대답을 뒤로 하고 되돌아오는 아버지의 표정을 아직까지 잊을 수 없다. 터벅터벅 걷는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참 서글펐다. 아버지의 어깨는 또 왜 그리 좁아보였을까.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해줄 능력이 없다는 현실이 움츠려진 어깨로, 흐트러진 발걸음으로 이어졌을 게다.
아버지의 낭패감은 나에게 열패감으로 다가왔다. 그해 여름, 두 달 정도 경남 온산으로 가 막노동을 했다. 일당도 적지 않았다. 등록금에다 한 학기 생활비로 쓸 만한 목돈을 마련했고, 그 경험을 ‘거리엔 비’라는 단편소설로 썼다. 그게 충북대 신문문학상 공모에서 선정됐다.
그런가보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무엇이든, 자식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다 들어줘야 한다는 책임감인가 보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기쁜 것이면 그 기쁨이 두 배가 되고, 암울한 것이면 그 암울함을 반으로 상쇄시키는 그런 것인가 보다.
내 아버지가 나에게 그러했듯, 나 또한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무게를 고스란히 돌려받고 있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