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광장]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보랏빛 알갱이가 손안으로 쏙 들어온다. 말랑하게 잘 익은 블루베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끌어낸다. 이내 손바닥 안이 그득해진다. 아기 다루듯이 그것들을 소쿠리에 담고, 눈은 벌써 옆 나무 주렁주렁 달린 블루베리 송이로 옮겨간다. 연둣빛이었다가, 핑크빛이었다가 보랏빛으로 분을 내뿜으면 알맞게 익은 것이다. 한 송이에 그런 색깔을 다 담고 있어서 익는 순서대로 따내다 보면 또 살이 올라 다음날 더 토실한 열매가 달리는 게 영 신기하다.

‘태양의 입맞춤’ 이란 뜻의 ‘Sun kissed’를 줄여서 만든 과일명이 있듯이 우리는 종종 과일을 잘 익게 하는 볕으로 ‘캘리포니아 태양’을 언급하는데, 유월 한낮의 태양은 무엇이든 여물게 하는데 손색이 없는 듯, 땡볕 하루가 지나면 어제 분홍이었던 블루베리가 보랏빛으로 살이 올라 있다. 신기한 경험을 한다.

일꾼 구하기가 어렵다는 지인의 농장에 새벽 시간을 할애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유월 한 달 지나면 블루베리 수확도 끝이라 부지런히 눈 비비고 새벽길을 나섰다. 작업시간이 5시 30분부터이니 5시 전에는 일어나서 농장까지 이동해야 한다. 금쪽같은 새벽 4시간. 9시가 넘으면 벌써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품값 대신 그날 딴 블루베리 4팩을 받는다. 올해 대부분 과일값이 그렇듯이, 마트에 가서 사 먹기가 겁이 날 정도로 비싼데 아침에 잠깐 일을 하면, 나누어 먹을 정도의 블루베리를 얻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직원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집 짓는 인부들 간식으로도 내놓고, 아들네도 골고루 보냈다. 사돈댁 세 군데로 보낼 때는 씨알이 좀 굵은 것으로 요청했다.

노동력은 저축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일 두 배로 일을 할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힘은 오늘 쓰고, 자고나서 생긴 힘은 다시 내일 쓰면 되는 것이다. 집에서 게으름 피우고 있을 새벽 시간에, 돈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것들이 그냥 땅으로 떨어져버리면 한낱 풀포기만도 못한 것이 된다. 조금 농익은 것은 지날 때마다 후드득 떨어지기도 해서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손가락의 감촉으로 그것들을 수확하다보니 며칠 만에 오른손이 까매졌다. 올겨울에는 햇볕 덕분에 감기에 걸리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맨손으로 식물을 만지는 일은 전국적으로 열풍인 ‘맨발 걷기’와 동일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새벽일을 끝내고 나면 몸에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허리에 찬 스마트 폰에서는 상쾌한 클래식 음악이 한창이다. 여름 새벽은 깊은 산 계곡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시원하다. 해가 어둠을 밀어내는데 바람이 필요했던 것일까? 산 위에서 부는 바람처럼 산들산들 불어와 열대야가 있던 날 새벽에도 바람이 찼다. 눈부시지 않은 부드러운 햇살이 주변 초록을 끌어당긴다. 날이 밝는 그 순간의 경이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는 멋진 시간이다. 풍경 좋은 고급카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 이상의 힐링이다.

블루베리를 ‘콩’이라고 부르는 세 살배기 손녀딸 사진이 도착했다. 요구르트에 잔뜩 넣은 블루베리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진을 보니 마음은 벌써 우체국에 가있다. 지난주에 보낸 게 아직은 남아 있다고 하나 실컷 먹게 해주고 싶어서 오늘도 우아하게 새벽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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