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양승복 수필가

내가 근무하는 병원이 코호트격리 되기를 몇 번, 균들도 무서워서 피해 가는 사람처럼 나도 그들을 잘도 피해 다녔다. 나만이라고. 나 하나만 걸리지 않았다고.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영웅처럼 의기양양했다.

나이에 비해 목소리가 차지고 촉촉하다고 칭찬이 일색이었다. 건강하다는 말은 나이 들어가며 듣기 좋은 말이다. 이쁘다는 말보다 더 기분이 좋다. 우리 나이 되면 허리도 아프고 무릎의 연골이 닳았다고 수술하는 사람도 있다. 다행히도 나는 건강하여 펄펄 나는 듯이 현장을 지켰다.

어느 날부터의 일이다. 모닝커피 맛이 안 나고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안났다.

이상하다. 아침에 진하게 한잔하는 낙이 없어지나? 싶었지만, 무슨 경계를 그은 것처럼 직원들과 더불어 한잔해야만 일을 할 수가 있었다. 그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감기 기운인가, 아니면 체기가 있나, 알 수 없는 찌뿌둥함이 내 몸을 휘감고 불쾌하게 했지만 특별히 어디가 아프지 않아서 만만한 소화제만 축냈다.

원인은 머릿속에 병이 들고 있었다. 오전에 책을 읽는데 눈이 뒤집히는 듯하고 글이 어른거리고, 글자가 복시로 보인다. 눈을 문지르고 다시 책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신경과로 갔더니 바로 뇌경색이란 소견서를 써 주는 것이다. 아닌데~ 했지만 오늘 중으로 꼭 가보란다.

생각해 보면 작년에도 같은 증상으로 병원 투어를 했다. 갑자기 눈이 흐려지며 나무들의 모양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아 안과를 찾았다. 노안이란다. 안경을 새로 맞추었다.

귀도 어느 날부터 멀리 들려 대화 시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TV 볼륨을 높였다. 이비인후과에 갔더니 또 늙음으로 가는 길이라 한다. 늙음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한가? 혈압약을 타다 복용하는 내과로 가서 뇌를 검사해 보고 싶다 했더니 눈에 좋은 약을 먹으라 한다. 너무 요란스럽다는 듯이 나를 힐책했다. 신체적 망상의 정신과 환자가 된 기분이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지인으로서 믿음이 가는 의사였기에 ‘그래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하고 위로를 했다. 늙는다는 것이 조금씩 매일 늙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보면 내 나이에 걸맞게 늙어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픔도 마찬가지다. 이곳저곳이 고장이나 마치 낡은 기계를 맞추는 듯이 병원 투어를 하다 보면 괜찮아지는 일도 있었으니 살면서 단단해지는 것은 마음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신경과 소견서를 들고 저녁에 도착한 종합병원은 내일 보자고 한다. 한가하게 남의 일이다. 시간이 없다고 지금 봐야 한다고 보채서 사진을 찍으니, 정 중앙에 서리태콩이 콕 박혀 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서리태 콩이 왜 뇌에 박혀 있지? 하는 의문밖에.

서리태의 크기에 의료진 모두가 놀라고 입원이 결정되고 나는 환자가 되었다. 작년에 내과로 가지 않고 바로 신경과로 갔으면, 실한 서리태가 아니라 쭉정이 콩을 달고 입원했을 것을. 이런 것은 한 번쯤 쭉정이여도 좋은데.

늙음으로 가는 길 치곤 혹독한 시련이다. 그렇게 신호를 주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나와 서리태의 첫 인연은 누구 하나 죽어야 끝이 난다. 그래. 니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한 판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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