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사임 결단
닉슨 美國(미국) 大統領(대통령)은 上院(상원) 彈劾判決(탄핵판결)에서의 승산이 희박해짐에 따라 조만간 사임하기로 最終(최종) 결정을 내리고 가까운 시일 안에 이를 공표할 계획이라고 美 東部地域(동부지역) 有力紙(유력지)들이 7일 보도했다.
양원의 옛 닉슨 지지의원들도 닉슨 大統領이 辭任(사임)압력을 받고 물러나는 最初(최초)의 美國 大統領이 될 것이며 그의 사임은 時間(시간) 問題(문제)라고 7일 예언했다.
로드 아일랜드의 유력紙 프로비던스 저널 블러틴紙와 페닉스 가제트紙는 이날 닉슨 大統領의 측근으로 알려진 한 消息通(소식통)을 인용, 닉슨 大統領이 극히 最近(최근) 사임하겠다는 最終 결단을 내리고 7일 아침 이를 그의 가까운 친지들에게만 통보했으며 곧 이를 공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로비던스 저널 블러틴은 닉슨 大統領이 自身(자신)의 사임만이 최선의 國家(국가) 봉사가 될 것이라는 決論(결론)에 도달, 괴로운 辭任 결정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고 報道(보도)하고 이 決定은 최종적이며 번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통 말을 인용했다.
또 알렉산더 헤이그 白堊館(백악관) 首席補佐官(수석보좌관)과 제임스 슨트 클레어 변호사도 최근 또다시 닉슨 大統領에게 辭任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9065호·1974년 8월 9일자 1면>
37대 미국 대통령 닉슨이 사임하게 된 것은 ‘거짓말’ 때문이었다.
이른 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리는 불법 도청 사건이 발화점으로 작용했지만 미국 국민들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불법 도청 사건 자체보다 정치 지도자가 국민을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거짓말이 횡행하고,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우리의 정치판에서 이는 다시금 되새겨봐야 할 역사적 교훈이다.
닉슨은 탄핵이 거의 확실하게 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한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선 1953~1961년까지 8년 동안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19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후보에 패배한 뒤, 1968년 대통령후보로 다시 정계에 입문해 허버트 H. 험프리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그의 치적으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들 수 있다.
닉슨은 1972년 2월 미국의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중국과의 관계정상화는 같은 해 5월 최초로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동안 그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러나 그의 2번째 임기는 대통령 재선위원회와 재정위원회의 활동에서 발단이 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파국을 맞게 됐고, 1974년 8월 8일 이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사퇴했다.
그는 반공주의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반공이 강조됐던 1952년 선거전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선정됐던 것도 이에 연유한다.
대통령직 사임 이후 닉슨은 캘리포니아 샌클러멘티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로 물러나 은둔생활을 했다. 1994년 닉슨은 그의 유언에 따라 국장을 치르지 않고 고향에 있는 아내의 무덤에 함께 묻혔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