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낸 친구들과 뒷동산 너머 으슥한 소롱골로 갔다. 칡넝쿨 우거지고 잡초만 무성한 소롱골은 웬만해선 어른들이 오지 않는 외진 곳이었다.
4홉들이 소줏병을 들고 녀석들에게 물어봤다.
“너희들 술 먹어 봤니?”
“얌마, 그건 초등학교 2학년이면 떼는 거여.”
녀석들은 논으로 들로 나가 일을 하는 아버지 막걸리 심부름을 하며 몇 모금씩 먹어본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만 술을 마셔보지 못했던 것.
“술 마셔보니 어떤데?”
“그거, 기분 끝내준다.”
“이게 꿈이니, 생시니?”
녀석들의 말을 믿기로 했다. 지금도 두어 잔에 좋은 기분이 솔솔 올라오던 차였는데, 더 좋아지는 기분이란 게 어떤 것일까 기대됐다.
그렇게 동네 꼬마 네 녀석들이 외진 소롱골에서 소주 4홉을 모두 마셨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지는 거였다. 후폭풍은 잊은 지 오래.
그런데 웬걸,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하는 거다. 움푹 들어간 땅인가 싶으면 튀어나온 땅이고, 튀어나온 땅인가 싶으면 움푹 들어간 땅이다. 내 몸과 정신은 온전한데 땅이 제 정신이 아닌 게다.
이미 음주에 이골이 난 녀석들은 끄덕없는데, 나만 비틀거리고 있었다. 술에 취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께서 바라볼, 술 취한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들놈이 어떨까 싶었다.
“이게 꿈이니, 생시니. 얘들아 도저히 안 되겠다. 세수 좀 해야겠다.”
설 앞이라 수도는 꽝꽝 얼어있었다. 아이들은 부엌에서 뜨거운 물을 가져다 수도를 녹인 뒤 그 찬물을 내 몸에 쏟아 부었다. 차가운 줄도 몰랐다. 그러면서 까무룩 의식을 잃어갔다.
“술 못 먹는 놈은 족보에서 빼버릴 겨”
의식의 저 편에서 뭔가 따끔따끔한 게 느껴졌다. 서서히 눈을 떠 보니 내 손톱 위쪽을 바늘로 열심히 찔러대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가 왜 집에 누워있는 거지. 그런 생각도 잠시, 나는 초등학생으로 해선 안 될, 내 죄과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났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 죄송해요.”
“아녀, 괜찮어, 괜찮어. 넌 괜찮어?”
평소 엄격하고 무서웠던 아버지의 그런 관대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얼음물 세례를 받은 내가 기절을 하자 친구 녀석들은 내 머리와 다리 한 짝씩을 들고 뒷동산 너머로 우회해 우리 집에 나를 던져놓고 도망쳤던 것이었다.
토사곽란이 찾아와 의식을 잃었던 것인데, 침술을 알고 있던 아버지께선 피를 돌게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죽어라, 아니 막내 아들놈 살리려고, 싸늘해진 내 몸에 바늘을 콱콱 찍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죽다 살아난 아들 놈에게, 평소 우스갯소리라곤 단 한 번도 하지 않던 아버지께서 말했다.
“괜찮어, 괜찮어. 살았으면 됐다. 우리 경주김씨 계림군파 판윤공 자손 집안에서 술 못 먹는 놈은 아예 내가 족보에서 빼버릴 겨.”
대학교에 입학한 뒤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자격이 주어졌을 때 아버지께선 캡틴큐 두 병을 사오라 하셨다. 그러면서 묵묵히 술을 따르며 잔을 건네셨다. 어릴 때 ‘전과’도 있고 해서 정신줄 붙잡고 마셨다. 부자가 두 병을 다 마시고 나서야 말씀하셨다.
“술은 어려운 사람한테 배워야 실수가 없는 법이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동네친구들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