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눈] 임명옥 우송대학교 교수
초등학교 때 아들 별명이 ‘강낭콩, 막내’였다. 귀여워서 붙여진 것이려니 했는데, 키가 작아 생긴 별명이었다. 필자는 아들 키를 키워보려는 별별 노력을 하지 않았다. 다른 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뭐든 인위적인 것은 좋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평범하게 먹이고 놀리고 했다. 문득 무지함과 나태함으로 더 키울 수 있는 키를 방치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생기곤 했다. 그럴 때면, 아들이 키 때문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거 같지 않다고 혼자 판단하고, 더 중요한 것이 많다고 믿으면서 불안을 떨쳐버렸다. 이렇게 엄마가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동안, 아들은 나름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
아들이 어렸을 때 아들 기죽지 말라고, 지금 생각하니 오글거려서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는 말을 했다. “땅에서부터 키를 재면, 작지. 그런데 하늘에서부터 키를 재면 크지. 어때 이 생각?” 어디서 주워들은 말인지, 이런 얘기를 하는 엄마를 보면서 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내가 정말 작구나’라고 확신하면서 짜증이 났을 거 같다. 당시 아들은 “나도 안다고, 그런데 마음이 아닌데”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필자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했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이 불쑥 “엄마, 이제 나보고 작다고 해도 별로 신경이 안 쓰여”라고 말했다. 그 찰나 편두통이 싹 가시는 것처럼, 편백 나무숲에 있는 듯이 폐 속이 상쾌해지면서 눈앞에 여러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 여러분들은 인품이 온화하고 자기 일에 열정이 있는 분들로 키가 별로 크지 않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 순간 왜 그분들이 떠오르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을까? 생각해보니 필자가 키에 대해 조바심을 내지 않고,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들 덕분에 필자는 훤칠한 키만큼이나 매력적인 다른 것에 가치를 둘 수 있었고, 아들은 엄마의 그런 생각들을 DNA처럼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한 아이가 올바른 생각을 하고,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여유와 용기를 갖게 하는 것은 누구 한 사람의 정성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많은 사람들의 인내와 수고가 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기대하는 결과를 얻게 되면, 관계된 사람은 물론이고 우주 만물에도 감사의 마음이 생긴다. 혼자의 힘으로 이루었다는 자만보다 겸손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하나를 알면 최소 그 반만큼 생기는 교만을 경계하게 되고, 스스로도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사람임을 인지하게 된다.
그런데, 희로애락이 공존하는 다사다난한 일상을 살다 보면 스스로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못 하고 지나치기 쉽다. 내 말과 행동 하나 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에 좋은 혹은 나쁜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음을 알아채지 못하기 일쑤다. 아들의 생각을 필자 혼자 힘으로 만든 게 아니고 주위 여러분들과 함께 만들어 왔음을 깨닫고 나니, 우리 모두가 영향력 있는 이웃이라는 점이 더 명확해졌다.
필자가 오늘 선한 영향력이 있는 이웃으로 살았는지 생각하다 갑자기,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딱 한 번 결혼식장에 갔다가 훤칠한 청년 몇 명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적이 있었는데 참 멋졌다. 생각해 보니, 키 큰 멋진 남성들이 필자 주위에 별로 없었던 것도 필자의 복이었나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