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석 영화감독이 2006년에 개봉한 ‘한반도’가 요즘 생각난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남북이 통일을 약속하고 그 첫 상징인 경의선 철도 완전 개통식을 추진하는데, 일본은 1907년 대한제국과의 조약을 근거로 개통식을 방해하고 한반도로 유입된 모든 기술과 자본을 철수하겠다며 대한민국 정부를 압박한다. 그런데 그 조약에 찍힌 국새가 가짜라는 것이고, 진짜 국새를 찾으면 조약 자체를 뒤엎을 수 있다는 것이 궁지에 몰린 우리 정부의 타개책이다.
두 가지 뜨악한 장면이 있었다.
1907년 조약은 대한제국과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 조약이므로 효력 자체가 없는 것인데, 일본이 이를 근거로 내정간섭을 한다는 설정과, 국새는 1세기 전에 망해버린 나라의 도장일 뿐이라며 통일보다는 원만한 대일관계에 앞장서 온 총리(문성근 분)가 ‘말썽’만 만드는 ‘국새 소동’을 암살까지 기획하며 막으려 했다는 장면이다.
영화에서 총리는 “미국, 일본, 중국 모두가 반대하는 통일을 해서 형제끼리 굶어죽자는 이야기냐”며 “한민족, 한반도, 이 땅의 자존감이 뭔데. 5000년 역사? 단일민족? 아니면 다른 민족을 한 번도 쳐들어가지 않은 도덕성? 다 패배주의를 자위하는 폐쇄성”이라고 단언한다.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는 인사
총리 역을 맡은 문성근의 대사는 당시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영화라는 장르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소위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36년 동안의 일제 강점 하에서 온갖 수탈과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에 대한 총리의 발언은 온전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나라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이의 인식이 저럴 수는 없다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요즘 한반도 영화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기시감이다. 되레 영화에 나오는 대사와 인식은 양반 축에 속한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지난 16일 KBS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일본에 대해 할 말을 못 하고 있다’는 취지의 질문에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이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면 엄중하게 따지고 변화를 시도해야겠지만,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며 “마음이 없는 사람을 억지로 다그쳐서 사과를 받아낼 때 그게 과연 진정한가”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통령실의 해명은 기름을 끼얹었다.
대통령실은 반박 과정에서 “그동안 1965년 한일 국교 수교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의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가 있었고 그런 사과에 피로감이 많이 쌓여 있다”며 “자신감에 기반한 한일 관계를 구축한다”는 취지라고 해명했다.
주체가 틀리면 뜻이 어그러진다
중요한 것이 왜 일본의 마음인가. 주체가 틀렸다. 중요한 것은 사과를 받아야 하는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의 국민들이다. 사과는 사과의 주체가 마음내키는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가 틀리면 뜻이 어그러진다.
대통령실의 해명도 번짓수를 잘못 찾았다. ‘피로감이 많이 쌓여 있다’는데, 피로감이 쌓인 주체는 누구인가. 분노하고 있는 우리 국민들인가, 일본의 눈치를 보는 정부인가, 아니면 마음내키는대로 사과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일본인가.
합쳐보면 이런 말이 된다. 과거의 만행이야 어찌됐든, 사과하든 않든 그건 일본 마음대로이며, 사과를 한다는 것도 피로감이 쌓여있으니 ‘그만 하자’는 것이다.
거의 20년 전에 개봉한 영화의 데자뷔를 경험하고 있는 이 즈음,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가져야 할 인식이란 게 무언인가 곱씹어 본다.
‘친(親)하다’의 어의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와 결합하면 그 뜻이 다소 변한다. 친일, 친미, 친북, 친중, 친러 등등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변한다. 거기엔 민감한 역학관계와 해원하기 힘든 서사가 있기 때문이고, ‘친’이 개입되는 순간 관계의 편향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