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그친 일본의 적극 수사
헌법상의 정치활동 자유 등 국내법의 테두리를 앞세워 온 8·15사건에 대한 일본 측 수사를 30일 그동안 유일하게 구속돼 있었던 요시이 미끼꼬의 보석으로 다나까 엄중수사 지시 또는 경찰청 적극수사 지시 등 말의 향연만으로 사실상 끝장난 셈이 되고 말았다.
수사를 맡고 있는 오사까부경은 그동안 ①미끼꼬의 구속 ②미끼꼬의 남편인 유끼오의 환문 ③범인 文(문)이 훔친 권총혁대의 수색 등에 그쳤을뿐 핵심인 배후관계 조총련 간부 金浩龍(김호룡)과 한청동맹 등과 자금 지원 등에 관해서는 내사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오사까부경이 그들의 국내범죄인 ①여권 부정발급 ②권총 도난 사후처리만을 수사한 결과가 되었으며 8·15사건 자체에 관해서는 사실상 아무런 수사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낳게 하고 있다.
물론 결창과 검찰은 미끼꼬의 장기 구속을 통해 배후수사의 돌파구를 찾아내려는 의도로 구속연장신청(2차)과 전격 기소 등 애를 쓴 흔적은 보이고 있으나 미끼꼬의 보석으로 그 길마저 막히고 말았다.
이는 당초 국내법의 테두리를 앞세운 日本(일본) 측의 회피적이며 소극적인 수사 자세에 변함이 없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유끼오를 제외한 다른 관련자의 소환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과 함께 文의 배후조직 지원인 韓靑과 조총련의 콧대만 높여준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하략) <9085호·1974년 9월 1일자 3면>
문세광이 사건을 일으키게 된 배후를 캐기 위해선 일본의 수사가 절대적이었다. 그가 일본에 거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검경 수사는 지지부진이었고, 심지어 회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물론 전 국민적인 분노와 규탄이 이어졌으나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건 항의하는 것뿐이었다. 50년 전 충청일보 기사는 그런 일본 측의 소극적인 자세를 질타하고 있다.
문세광(文世光)은 1951년 12월 26일 일본 오사카시에서 석면 제품 제조업자로 일하던 경남 진주 출신의 문병태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문세광은 원래 오사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이쿠노키타(生野北)의 지부에 가입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 김일성 선집, 마오쩌둥 어록 등을 탐독하면서 좌익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1973년 9월 조총련 이쿠노니시의 지부 정치부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호룡을 처음 만난 문세광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하고 있던 박정희를 암살해서 인민 봉기의 기폭제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1973년 10월에는 자신의 여자 친구이자 공범인 요시이 미키코에게 대한민국에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고 1973년 11월에는 공작금 50만엔을 받았다.
대한민국에 입국한 문세광은 8월 15일 광복절 경축행사가 열린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육영수 여사를 살해했다.
문세광은 판결 선고 4개월만인 1974년 12월 20일, 속행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박정희 대통령과 대한의 국민 전체에게 송구하고도 거듭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다. 지금 과오를 깊이 뉘우치고 있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