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싫어하는 이야기가 첫 번째 군대 이야기고, 두 번째 축구 이야기라고들 한다.
이보다 더 싫어하는 이야기는 군대에서 축구하던 이야기라 하는데, 이것이 설문조사 결과인지, 신빙성은 어느 정도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여자들이 첫 번째로 싫어한다는, 군대 이야기를 하려 한다. ‘세상의 반’이 싫어하더라도 남자들이 굳이 군대 이야기를 하는 건, 그 곳엔 그들의 청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
군대 뭐 같다’고 하고,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하면서 입대 하자마자 제대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는 대한민국 청춘들의 마음엔 군대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보단 부정적 이미지가 훨씬 크게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푸른 제복에 휩싸인 제 젊은 날의 초상을 온통 음울한 듯 여기면서도,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누구랄 것도 없이 핏대 세우고 침을 튀기며 열변의 ‘구라’를 쏟아내는 것은 그곳이 또 ‘사람 사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휘관으로서 이럴 때가 가장 힘들다네”
1987년 5월 20일 늦은 밤, 중대 상황실에서 통신을 맡고 있었는데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중대장실에서 신호가 왔다.
“통신보안 00번, 상병 김명깁니다.”
“으음, 그래 김 상병. 중대에 별일은 없지?”
“네, 이상 없습니다.”
“그래, 자네 잠깐 내 방으로 오게.”
중대장실로 들어가니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김 상병 어머니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셨나?”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아니 둔기로 뒤통수를 강하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애써 부정했다.
“아니, 아닙니다. 건강하셨습니다.”
그래야만 강하게 다가오는 두려운 느낌을 지울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머닌 내가 군대 오기 전 매우 허약하셨고, 잦은 병치레를 하셨다.
“뭐라 얘기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휘관으로서 이럴 때가 가장 힘들다네.”
중대장이 전보쪽지를 건넸다. 거기엔 ‘모친사망급래요’, 정확히 일곱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날 난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전보를 받기 전의 세상과 받아 본 이후의 세상은 완전 딴판이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옷 다리고 군화 닦고 새모자를 쓰며 휴가 가서 어미니를 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이틀 후가 내 휴가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휴가 나오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야”
중대장은 다음날 철원군 서면에 있는 와수리까지 당신이 몰던 오토바이에 나를 태우고 데려다 줬다. 우리 부대가 철책 근무를 하고 있었던 터라, 민간인 마을까지 갈 교통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너무 흐트러지지 말고.”
중대장은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중대에서 휴가 날짜를 짜는 병사가 중대 서무병이었던 바로 나였고, 나는 내 휴가를 5월 22일로 정했는데, 어머니의 급작스런 별세로 내가 짠 휴가에서 하루 일찍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참 공교로운 일은 어릴 적 어머니가 내게 해주시던 말이었다.
“우리 윗마을에 마음 착한 효자가 있었는데, 글쎄 그 사람이 첫 휴가를 나와 당고개를 넘어오는데 자기 동네에 훤한 거야.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자기네 집이야.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고 단걸음에 집에 도착해 보니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셨던 거였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