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지난여름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을 다녀오는 특별한 여행을 했다. 고급스러운 편의시설을 다양하게 갖춘 여행목적의 배인 크루즈를 통해서가 아니라 운송을 목적으로 제작한 저렴한 교통수단인 페리를 이용한 여행이었다.

청주에서 부산까지 280km,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항까지 225km, 시모노세키에서 동경까지 거리는 1000km이다. 시모노세키는 동경보다는 부산까지의 거리가 1/4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이러니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의 대한해협은 울릉도 가는 거리와 비슷하게 가깝다.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釜關페리(부관페리)는 대한해협을 운항하는 여객선이다. 한국과 일본의 배가 교대로 운행하며 소요 시간은 14시간 정도이다. 부산항에서 오후 6시쯤 통관하고 승선한 페리는 8시에 출항하여 다음 날 오전 8시경에 일본 시모노세키항에서 입국 수속을 한다. 항해 자체는 7~8시간이지만 부산항 통관 후 출항 전 대기시간과 도착 후 항만 직원들이 출근할 때까지 배 안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포함돼서 그렇다.

부관페리는 일본에 의해 1905년부터 운항이 시작되어 이미 120년이 되었다. 해방 후 중단됐다가 1970년 재개된 후 쭉 운행되고 있으니 그 속엔 별별 사연이 다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침략의 야심으로 가슴 뛰었던 왜놈이나 그의 앞잡이로 뭣 좀 얻어먹으려는 양아치도 건넜을 것이며, 기울어가는 조국에 비분강개한 충절의 우국지사도 건넜을 것이다. 그중엔 1926년 이맘때 부관페리에서 대한해협으로 몸을 던져 비극적인 동반자살로 생을 마감한 극작가 ‘김우진’과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도 있다. 시대에 따라 승선객의 성향도 달라졌겠지만, 대부분은 이도 저도 아닌 생존을 위해 흘러 다니다 보니 이 바다를 건너야 하는 자였을 것이다. 이제는 여행객이나 장사치들이 승객의 대부분이다.

배에는 식당, 편의점, 노래방, 목욕탕 등 하룻밤을 그럭저럭 견딜만한 편의시설이 있다. 휴가철이라 500여 명의 승객이 만석이 된 배에는 보따리 장사를 포함해 배에서 1박으로 저렴한 여행을 하려는 여행객과 이색 체험을 위한 여행객 등 각양각색의 사람으로 어수선하다. 준비된 탁자에는 족발 통닭 등 각자가 싸 온 음식들을 펼쳐놓고 맥주를 기울이는 사람들로 요란하다.

1인당 달랑 매트리스와 선반 하나가 전부인 10인실의 열악한 선실에 낯선 이들과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에서나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한다. 시끄럽게 굴거나 코를 골거나 술 냄새를 풍기는 등 다소 인내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나 또한 그들에게는 인내의 대상일 것이다. 일찌감치 선내 목욕탕에서 샤워하고 누워 매트리스에 몸을 맡긴다. 밤이 깊어지면서 10인실의 불이 꺼지고 먼바다의 잔 흔들림이 선실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 위로 전해진다. 일본을 향하는 태평양 한 귀퉁이 망망의 바다에 별빛과 달빛과 바람이 모여 이 밤을 함께 보낸다.

10인실에서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현해탄 너머 일본 연안의 육지가 어스름이 보인다. 간몬해협에 아침이 오고 여명의 빛이 그 너머로 쏟아진다. 통관 후 출항 전의 기다림, 항해 후 입국 전의 긴 기다림, 기다림을 즐기지 못하면 여행은 고통일 뿐이다. 여행은 늘 그렇게 긴 기다림과 짧은 절정으로 이루어진다. 아마 삶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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