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과 함께 목도한 전투기 ‘월북 사건’이 떠오른다.
1987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중대본부엔 대대에서 시찰나온 소령 계급의 작전관과 중대장, 그리고 서무병인 내가 있었다.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데, 중대본부 뒤에 있는 천불산 쪽에서 비행기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아주 작았다. 그런데 쉬쉬쉬~ 나던 소리가 갑자기 쐐애액~ 굉음으로 바뀌었다. 우리 전투기 두 대였다. 순식간에 옛 GOP였던 천불산을 넘어 중대본부 바로 앞에 있는 철책선까지 가로지른 비행기는 눈깜짝할 사이 북한으로 넘어가 버렸다.
넋이 나간 작전관이 말했다.
“아니 저거 뭐야? 넘어가네, 넘어가네, 아이구 넘어갔네!”
후일 들려온 소문으로, 좌표를 잘못 읽은 미군 조종사가 접근 불가를 경고하는 티탑을 보지 못한 채 철책을 넘어 북한까지 갔다 되돌아 왔다는 것이었다.
“자네와 참 잘 어울리는 직업이네”
그날 중대장은 초병들을 크게 질책했다. 유사 시 대응이 너무나 미흡했다는 것이다. 훈련은 실전을 위해 하는 것인데, 비행기가 월북하는 상황에서 대공사격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군인이 군인이냐는 질책이었다. 중대원들은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지만, 뭐 어쨌든 두 번 다시 그런 대형사고는 터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랄까. 그 후 중대장은 1987년 수도방위사령부 제55경비대대 제3경비제대장으로 가면서 인연은 끊어지는 듯했다.
꽃동네로부터 ‘꽃동네사람들’ 후속 이야기를 책으로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꽃동네사람들’은 한 일간지 기자로 근무할 때 시리즈로 썼다가 발간했던 책 표제다.
가평꽃동네 가족들을 취재하다가 인근 부대에서 봉사활동 나온 소령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잊혀지지 않는 중대장님이 있는데, 그 분의 근무처를 알 수 있겠느냐’고 요청했다. 그 소령은 김용현 대위 이야기를 하자 곧바로 계룡대에서 중령으로 근무하고 계신다는 답을 주었다.
통화를 했다. 중대장은 곧바로 기억해내곤 매우 반가워하셨다.
‘무슨 일을 하느냐’는 질문에 기자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자, “그래, 자네는 자기 주관이 뚜렷했었지. 자네와 참 잘 어울리는 직업이네”라며 좋아하셨다.
늘 원칙을 지키셨던 나의 중대장님
세월이 흘렀다. 조카가 군대에 가게 됐다. 녀석은 독립심이 강했고, 피지컬이 강했다. 188㎝ 키에 90㎏ 초반, 다부진 몸이었다. 중국 북경 인민대학교를 졸업했는데, 중국어 수준이 원어민과 다름없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쭈욱 중국어를 배웠기 때문이었다.
형님이 부탁을 했다. 아들 녀석 특기를 살릴 수 있는 보직이 없겠느냐, 네 군 시절 중대장이 지금 장군이라는데 부탁 좀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평생 남에게 부탁하는 걸 꺼리는데다, 기자로서 양심 또한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지만, 거절도 어려워 ‘나의 중대장님’께 전화를 했다.
‘장군님 되신 것 축하드린다’는 의례적인 인사말 끝에 조카 녀석 이야기를 했더니, ‘그 정도 훌륭한 인재라면 군이 적절히 배치하지 않겠느냐’는 완곡한 거절의 답이 돌아왔다.
그러면서 “언제 한 번 보자”는 말 끝에 “근데 자네답지 않구먼” 하셨다. 중대장으로 모시던 시절이나 장군이 된 이후나 한결같이 원칙을 지키는 모습이다. 그 답변은 서운했다기 보단 나 스스로를 부끄럽게 했고, 되레 후련했다.
현역병으로 입대했던 조카는 상병 때 해군 장교시험에 합격해 UDT 대위로 제대했고, 지금은 소방관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 와서 보면, 그때 내 청탁을 완곡히 거절했던 김용현 대위님께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