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광장]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무궁화는 여름꽃이다. 시월은 누가 뭐래도 가을인데, 이 가을에 아직도 밭에 남아 있는 무궁화꽃을 보노라면 애틋하다. 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한 번이라도 더 꽃을 바라보고 어루만진다. 잎사귀보다 꽃이 무성하던 여름과는 달리, 한 나무에 몇 개씩 단출하게 달린 꽃송이가 계절을 뛰어넘어 차가운 아침에 새로 피는 모습이 대견했다. 오늘 핀 것은 저녁에 사라질 것이다. 몇 개의 몽우리가 남아 있는지 헤아려 보았다. 한 나무에 삼천 개부터 오천 개까지 꽃이 핀다고 했는데 여남은 봉우리가 눈에 띈다. 그것이라도 다 명을 다하면 좋겠지만, 된서리라도 내려치면 꽃도 피우기 전에 제명을 다할까봐 안타까운 마음조차 든다.

농사를 지으며 달력을 자주 살핀다. 대체로 보름을 기준으로 매년 같은 날이거나, 하루 이틀 달리 오기는 하지만, 일 년 365일, 열두 달을 24절기로 나누어서 농사에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은, 때로는 신기하리만치 정확해서 놀란다. 씨앗을 뿌리고, 모종하고, 추수하는 날짜를 가늠하려면 절기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기후변화로 봄, 가을이 없어진 것 같다는 말도 하지만 절기를 따라 농사를 지으면 알 수 있다. 씨 뿌리고 거두는 날짜가 절기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2월 4일 입춘을 시작으로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가 있는데 4월 5일 청명부터는 봄이 무르익는 것이다, 식목일이 그즈음에 있듯이 청명한 봄 날씨, 봄비 내리는 곡우에 온갖 채소 작물이며 과실나무 등을 심는다. 전지한 무궁화도 그 무렵까지는 식목을 마쳐야 한다.

여름을 세우는 날, 입하부터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의 절기 중 소만 무렵부터 무궁화는 물론 다른 작물들도 햇볕을 받아 본격적으로 성장을 시작한다. 가지치기하고 거름을 주어 꽃을 피우도록 매만지면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부터는 무궁화가 본격적으로 하나둘씩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한여름 뙤약볕에서도 매일 새롭게 피는 무궁화 꽃밭에 들어가면 그들의 싱그러운 생명력에 생기를 얻지만, 엄청난 생명력을 자랑하는 잡초와의 전쟁도 마주해야 한다.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도 풀을 없애기 위해서는 뭐니 뭐니 해도 호미가 일등 공신이다. 애지중지 무궁화를 보살피려고 잡초를 뽑다가, 그것도 야산에 흐드러지면 어떤 꽃 못지않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때로 주춤해지기도 한다.

입추를 지나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의 절기는 본격적으로 추수가 시작되며, 상강에 이르면 땅에는 서리가 내리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들판은 비어 가는데 그즈음에도 무궁화가 여전히 새로이 피어나고 있다. 이른 아침 밭에 나가보면 풀들이 하얗게 서리를 이고 있다. 코끝에서 된 김이 나는데도 여전히 봉우리에서 꽃잎을 밀어내는 모습을 보며 무궁화를 여름꽃이라 해도 되는지 갸웃해진다. 며칠 지나면 입동이다. 그래서 매일 아침 꽃의 안부가 궁금해서 가까이 살펴본다.

하지부터 피기 시작하여 가을의 끝인 상강까지 두 계절에 걸쳐서 끊임없이 피고 지는 무궁화를 보면서 무궁화가 우리 민족의 굴하지 않는 끈기와 영원무궁한 정신력을 닮았다는 말에 공감한다. 이제 며칠 후면 겨울을 알리는 절기로 입동을 맞이한다.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의 농한기에 눈 덮인 들판은 고요해질 것이다. 지렁이와 날벌레와 잡풀이 모두 언 땅속으로 숨어들고, 무궁화 가지는 겨울을 견디어 내며 봄을 준비할 것이다. 시월 끝자락까지 꽃을 피워낸 무궁화를 보면서, 어떻게 관리해야 칠십에도 꽃다운 나이가 될 수 있을지, 거울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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