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김헌일 청주대 생활체육학과 교수

10월 10일 모든 언론이 한 기사로 도배되었다.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었다. 아시아 여성 최초, 한국 작가 최초, 김대중 대통령에 이은 두 번째 수상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었고, 작가의 작품은 물론, 일생, 가족, 활동까지 전방위적인 보도가 이어졌다. 해외 언론 보도를 국내에 실어 나르기에도 바빴다.

서점에는 ‘한강’ 작가의 책을 찾느라 줄이 이어졌다. 책을 구하지 못해 이리저리 서점을 찾아 헤매고, 수요 물량을 공급하기 위해 인쇄기는 정신없이 돌아갔다. 급기야 작가의 책을 구하기 어려운 지역 작은 서점들은 ‘한강’ 책을 공급해달라는 단체 행동까지 나섰고, 대형 서점은 작은 서점에 책을 양보하기 위해 판매 중단 선언을 하는 지경까지 갔다. 여기저기 지자체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이어지고 있고, 작가의 고향 광주에서는 생가터 기념 사업이 벌써 시작되고 있다. 세상은 이런 모습을 ‘한강앓이’라고 한다.

앓이는 앓이인가보다. ‘한강’이라면 사람들이 달려든다. 한강 책 읽자고 독서 모임을 열어 놓고는 이성 교제 등 스토킹 범죄나 사이비 종교포교 행위도 발생하고 있다. 유명 코미디 프로에서는 작가 외모 풍자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한쪽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의 교육적 필요성을 들어 전국 초중고 학교 도서관에 수상작인 ‘채식주의자’를 비치하자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작품에 묘사된 형부와 처제의 비윤리적 성행위, 자살 등 내용이 아이들에게 유해할 수 있음을 우려해 반대 서명운동에 나섰다. 화젯거리에는 기가 막히게 반응하는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온통 거리에 수상 축하 현수막을 걸었다. 한강 앓이가 맞다. 기쁨과 함께 아픔도 밀려온다.

온통 ‘한강’뿐, 세상에 이름을 가진 수많은 작가는 갑자기 존재가 희미해진다. 이름이 사라진다. 지금 세상의 문학은 ‘한강’ 말곤 없다. 승자독식이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배우 출연료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이 나왔다.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 한국작품의 세계시장 성공 이후 한국 콘텐츠의 상품성이 높아졌고, 투자가 이어졌다. 투자기업은 수익이 보장된 스타 배우를 선호했고, 출연료, 이른바 몸 값이 올라갔다. 제작비가 급속히 치솟았다. 한정된 예산에 제작 편수가 줄어든다. 특정 배우 이외의 배우들에게는 출연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악순환이 이어져 출연료를 제한하겠다는 투자 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다 함께 몰락하는 상황으로 간다. 스포츠에서는 늘 있는 현상이다. 금메달만 기억한다. 최후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참가에 의미를 두자’는 말은 패자끼리 주고받는 고통의 소리다.

◌◌◌상 시상식, ◌◌◌영화제 시상같이, 상을 수여하는, 성적을 중시하는, 승리를 추구하는 문화는 서열화 구조를 만든다. 문화가 스포츠화 되어간다. 유행이 거품과 같듯, 대중이 모여 돈은 되지만 잊혀진 스포츠 스타처럼 조만간 사라진다. 남은 자리는 공허하다. 문화는 서열화로 성장할 수 없다. 경쟁이 아닌 인간의 삶 그 자체여야만 한다.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을 받을 때 아름다운 문화로서 가치가 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특성이 내재하여 형성된 제도나 대중의 일시적 특정 현상으로 몰아가서는 성장할 수 없다. 스포츠가 아닌, 마냥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스포츠의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듯이 문화도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게 해주어야 한다.

수상 후 한강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쓰는 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사람이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써가면서 책 속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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