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시월 끝자락이 다가오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생명을 다한 플라타너스 나뭇잎은 도로로 떨어져 바람이 부는 대로 뒹굴다가 거리의 환경미화원에 의해 커다란 마대에 담겨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무렵은 몹시 추웠다. 계절로만 보자면 그다지 추울 때도 아니건만 왜 한기에 갇혀 온몸으로 절망했던가. 연탄으로 겨우 난방하던 시절이다. 겨울을 나려면 연탄 500장쯤은 미리 장만해 두어야 했는데 연탄창고는 텅 비었고 쌀독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어미라는 사람은 무시로 부는 바람에 마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어도 천진난만한 자식은 추운 줄도 모르고 세발자전거를 탔다. 그 모습 때문에 마음 놓고 절망조차도 하지 못했다.

집 앞의 은행나무가 1주일 만에 확연히 달라졌다.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서인지 도저히 물들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던 나뭇잎이 서둘러 물들고 있다. 창밖에 자주 눈길을 주려고 애쓴다.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애잔하게 서 있을 무렵이나 돼서야 그 무예 바쁘다고 이렇도록 모르고 지나갔을까 매번 자책하니 올해만큼은 같은 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11월이 지나서도 단풍명소를 소개하는 글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럴수록 마음만 조급했다. 여느 해처럼 올해도 단풍 구경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것은 아닌지. 오색 국화와 구절초, 그리고 단풍마저 아름답다는 보은 말티재 전망대는 언제나 가보게 될지. 2km나 이어진다는 담양관방제림과 단풍 천국인 경주 불국사도 감히 가볼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천안의 독립기념관 단풍나무 숲길도 충남의 단풍명소로 손꼽힌다. 11월 1일부터 일요일까지 2주 동안 밤 9시까지 야간 개장을 한다기에 아쉬운 대로 11월 첫 주에 그곳을 갔다. 그러나 단풍은커녕 단풍의 계절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구름이 걷히고 해가 비추기 시작해서야 푸르게 보이던 나뭇잎이 햇빛을 받아 옅게나마 붉었다.

올해 단풍은 예년보다 늦게 물들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색과 화려함도 덜하고 흐릿하다고 한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첫 단풍이 관측된다는 설악산의 단풍도 절정에 이르기도 전에 대청봉과 중청봉 등 정상 부근은 이미 단풍이 다 떨어졌다.

지난해보다 나흘, 평년보다 엿새나 늦게 물들기 시작했다고 수치로 말을 하지만, 저지대는 이미 단풍이 많이 졌고 지난 10월에 내린 많은 비와 초속 30m 이상의 태풍급 돌풍으로 인해 고지대는 아예 단풍이 다 지고 말았다. 사계절의 경계마저 모호하게 만드는 이대로라면 10월까지 침범한 기나긴 여름 더위에 이어서 가을도 가을답지 못하게 보내고 곧 겨울을 맞게 생겼다.

우리나라의 단풍놀이는 1970년대 초반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교통수단의 혁명이라던 경부고속도로가 신설되고 고속버스가 생기자 고속도로 사이로 지방도로들도 속속 들어섰다. 잘 짜인 도로망 덕분에 바야흐로 전국이 하루 생활권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고 이에 따라 관광지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산을 찾는 등산객에 의해 단풍놀이는 절정에 이르렀다.

우리는 역사 이래로 최고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이보다 더 번성한 때가 또 올까 싶을 정도로 물질의 풍요도 누렸다.

그러나 지금 전쟁을 걱정한다. 경제가 어렵다는 말만 무한 반복하는 시대를 산다. 수출 낙관론도 깨졌다. 시대의 역행이란 감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비웃듯 뭐 하나 좋아진 것 없이 서서히 역행의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

깊숙이 넣어두었던 긴 패딩 외투를 다시 꺼내어 거리로 나서겠다는 사람이 늘어간다. 그나마 겨울 날씨가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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