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단풍의 계절이 지나가고 겨울이 온다. 나무가 아름다움을 뽐내는 절정의 시절은 종류에 따라 다르다. 물론 인간의 오감을 기준으로 정한 기준이긴 하지만, 봄꽃이 좋은 나무도 있고 여름날 무성한 잎의 그늘과 녹음이 아름다운 나무가 있는가 하면 가을 단풍이 고와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나무도 있다.

인간의 삶도 그렇다. 어떤 이는 어린 나이에 무언가를 이뤄 젊은 날에 이미 빛을 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삶이 빛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낙엽이 아름다워도 이제 잎을 떨구고 죽음처럼 얼어붙은 겨울을 맞아야 하듯이 나이 들어 빛나보아도 남은 날들이 제한적인 건 어쩔 수 없다. 특히 육체적 능력이나 건강 등은 세월과 더불어 쇠약해지고 문제가 생길 소지가 많아지는 게 순리다. 겨울을 목전에 둔 가을 단풍의 정돈된 아름다움을 보니 노년을 향해 줄달음치는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산과 들의 초목이 모두 황량한 계절의 끝을 향해 제 갈 길을 간다. 오랜 세월 사용으로 낡아빠진 내 몸의 모든 장기도 각자 그 끝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더러는 이상 소음도 내고 어떤 곳은 경고음을 내며 살펴봐 달라고 비명도 지른다.

계절을 보내는 늦가을 비가 거리를 적시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이른 아침 예약해 둔 병원에 건강검진을 위해 갔다. 마지막 생명을 태우며 곱게 물들었던 가로수의 형형색색 단풍이 아름다움을 뽐내고는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에 분분히 흩어진다. 나이가 든 후로는 건강검진을 하라는 통보를 받으면 마음이 늘 불편하다. 마치 낡은 차를 몰고 차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정비공장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안전 운행을 하려면 각종 부속이나 장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혹은 부품의 내구연한이 다됐으니, 교체가 필요하지는 않은지를 확인하는 게 당연하고 꼭 필요한 일이다. 낡은 차라면 이곳저곳 손볼 곳이 많을 것이고 교체를 요구하는 곳도 많을 게 당연한 일이니, 다양한 검사 기기를 들이대며 하는 점검이나 정비가 더 부담스러운 일이 된다. 수리할 곳은 많은지 과도한 수리 비용이 필요하지 않은지 걱정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나이가 들어가며 건강검진을 받으려니 똑같은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피를 뽑고 각종 지표를 측정하고 평소에 맨눈으로는 볼 수 없던 곳을 내시경이나 초음파 장비로 들여다보는 일은 고역이기도 하지만 심적으로 꽤 부담스럽다. 낡은 차일수록 점검과 정비가 더욱 필요하고 나이가 들수록 건강검진이 꼭 필요하지만, 또한 더욱 부담스럽고 하기 싫어지는 게 건강검진이다.

단풍이 아름답지만 이제 곧 잎이 지고 겨울이 올 상황인 거나, 이런저런 삶의 부담에서 놓여난 노년의 초입인 나이지만 이제 끝이 그리 오래 남지 않은 상황이 똑 닮았다. 이런 상황을 묘사한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낙유원(樂遊原)이란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이 ‘夕陽無限好, 只是近黃昏(석양무한호, 지시근황혼)’이다. 아름답게 물드는 석양이 한없이 아름답지만 이제 곧 그 끝이 오고 어둠이 오리라는 뜻이다. 검진도 그렇고 검진 후 결과를 기다리고 통보받는 것 등은 다 그렇게 편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아름다운 단풍을 피우기 위해 그리고 어둠이 오기 전 아름다운 석양을 누리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 그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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