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연말이 되면 상투적으로 사용하던 ‘다사다난했던’이라고 시작한 인사말의 의미가 어느 해보다 실감 난다. 지난해는 정말 다사다난했다. 사람이 한평생 사는 것 자체가 변수를 품었으니 어찌 다사하지 않을 수 있으며 다난하지 않길 바라겠는가. 그랬어도 지난 한 해에 생겼던 변수는 유독 견디기 힘겨웠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대부분 불확실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일을 의연히 받아들인다는 건 인간에게 매우 한계를 느끼는 일이다. 아무리 불확실성의 연속이 삶이라지만 매일 숨차게 들려오는 세상 소식을 듣고 보는 것조차 두려우니 차라리 눈과 귀를 막아 이 기막힌 세상에서 멀어지고 싶다.
가을에 태어난 내게 선물을 했다. 생일을 맞은 날 오래도록 망설이던 항공권을 끊어 그것을 내게 선물했다. 코로나 3년을 견디며 코로나의 공포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발목을 잡힌 일이었다.
감히 해외여행은커녕 국내도 내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명분으로 제지당하고 있었으니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그 사이 의기는 소침해지고 품었던 꿈과 자신감도 비례해서 힘을 잃었다. 포기하려던 순간, 날갯짓은 스스로 하는 것이라고 용기를 냈다. 변수보다 상수를 선택한 것이다.
에게해를 품은 그리스 산토리니섬 여행 중에 비상계엄령 선포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무슨 말이람. 서둘러 유튜브를 찾았고 그 밤, 밤새도록 예상치 못한 변수 앞에서 아침이 밝아오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 계엄령 선포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되었다. 이듬해 여름 친구들과 망상해수욕장을 갔고 밤에 해변을 걸었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의해 오리걸음을 걸으라는 수모를 당했다.
1980년 7월, 군 복무를 마친 남자 직원이 다니던 직장에 복직했다. 그는 공수부대 출신으로 5월 18일 이후, 광주에서 생긴 일을 훤히 안다고 했다. 바짝 대들어 묻자 알아듣지도 못하게 중얼거리더니 재차 물으니 아예 입을 닫았다. 신문이나 라디오, TV를 통해 겨우 세상 소식을 알 수 있을 때였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 국회가 연 본회의에서 6시간 만에 계엄 해제 결의안 가결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만약 재석한 친한 계 여당 의원 18명과 야당 국회의원 172명, 전원 찬성이 없었다면,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를 통해 소식을 들은 국민이 국회로 몰려가지 않았더라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을까. 세비만 축낸다고 수없이 원성 듣던 입법기관인 국회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지경에 이르렀을까. 생각할수록 끔찍하기 짝이 없다.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국회 해산은 대통령의 독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계엄 모의 9개월, 구속된 장군은 15명, 병력 투입 1천500여 명, 준비한 탄약은 1만 발. 계엄 당시 특수전사령부와 수도방위사령부의 45인승, 25인승 군용버스 107대와 군용 오토바이 25대, 장갑차로 알려진 소형 전술 차량 2대 등이었다.
계엄 실패 후 대통령은 거짓 담화문을 발표했다. 아무리 변명해도 조사로 드러난 사실이 뻔히 존재하는데 우긴다고 될 일인가. 이미 기둥 밑부터 썩고 있었다. 가뜩이나 힘들었던 한국 경제는 계엄 이후 아예 나락으로 떨어졌다. 거리 게시대에서 찬바람을 견디는 정치인 명의로 건 경제 걱정하는 체하는 현수막 꼬락서니가 그래서 더욱더 거슬렸다. 그래도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