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생각하며] 황혜영 서원대 교수
해운대를 다시 찾았다. 해운대에 올 때면 해변도 걷지만 늘 동백섬 둘레를 돌곤 한다. 동백섬은 신라 말 대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의 흔적이 남은 유적지 중 한 곳이다. 동백섬 남단 APEC 전망대 아래 뉘어진 바위에 새겨진 ‘海雲臺’ 석각이 있다. 이 석각은 최치원이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국운을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벼슬을 떠나 은거하다 이곳 자연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대를 쌓고 ‘바다와 구름, 달과 산을 음미하면서 주변을 거닐다가 암석에다 자신의 호를 따 세 글자를 음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해운대 지명도 그가 이곳에 자신의 호를 붙여 지은 대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해운대 석각이 최치원의 친필이라는 확실한 기록은 없다. 다만 동래 부읍지 고적조에 실린 고려말 문호 정포(1309-1345)의 시 구절 ‘대는 황폐하여 흔적도 없고, 오직 해운의 이름만 남아 있구나’로 해운대 석각이 적어도 고려 말 이전부터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오랜 세월 비바람과 파도로 석각은 많이 마모되었지만 그래도 단정한 글자를 알아볼 수 있다. 선생이 머물렀다 하여 동백섬 위에는 최치원 유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남쪽에서 유적지로 오르는 돌계단을 몇 계단 오르면 해운대 앞 바다가 펼쳐진 정자가 있다. 잠시 앉아 바다와 하늘, 구름과 해변을 바라보노라면 천 년 전 옛 시선과 포개지는 듯하다. 다시 돌계단을 조금 더 오르면 넓고 나무로 둘러쳐진 대에 최치원 동상과 신도비, 해운대 정자가 나온다.
경주 최씨의 시조이자, 토황소격문으로 당시 중원의 문단에 큰 파문을 일으킨 신라인이었으며, 현존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 ‘계원필경’의 저자인 최치원은 또한 한민족 전통 사상인 풍류에 대한 논의에서 거의 빠짐없이 인용되는 난랑비서문(鸞郎碑序)의 저자이기도 하다. 최치원이 직접 쓴 글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 조에는 최치원이 난랑비서문에서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 이른다. 이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곧 삼교(三敎)를 포함하여 중생을 교화한다.”라고 말하였다고 나와 있다.
최치원은 화랑도의 핵심을 풍류라고 하고, 이 풍류도는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는 것으로 외래 사상의 아류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상이라 하였다. 한국 자생적 사상인 풍류는 자연과 인간의 본원적 원리를 하나의 거대한 사상으로 통합하며 다양한 외래 사상들을 배척하는 대신 보다 더 크고 넓은 사유 체계 안에 유연하게 아우르는 융합사상이다. 더 나아가 풍류는 인간에 대한 포용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과의 융화를 추구하는 자연친화적인 사상이다.
민주식은 미학적 관점에서 풍류를 자유로운 정신으로 세속적 가치를 초탈하고 현실과의 관련을 지니면서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주객의 구분 없이 서로 융화하며 놀이하는 마음으로 즐기고, 여유롭고 유연하게 사물에 심신을 열고 사는 삶의 태도라고 하였다. 풍류는 온몸에 바람을 맞을 때 비로소 느끼는 정신의 자유이다. 동백섬을 다시 돌며 최치원이 남겨준 궁극의 경지, 풍류에 나를 내맡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