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의 자녀교육은 가정에서 몸에 익힌 배움에 대한 의욕은 학교에서도 지속되도록 한다. 그리고 학교 공부도 가정에서 지속되도록 한다. 그리고 학교공부도 가정에서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즐거운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배움이란 꿀과 같이 달콤하다는 인상을 가지도록 한다. 유태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1학년생이 처음으로 등교 하는날 ···· 그날은 신입생에게 공부는 사탕과 같이 달콤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날이다.

선생은 22자의 히브리 알파벳을 적은 종이를 준비하고 손가락에 꿀을 찍어서 알파벳 글자를 따라서 쓰게 한 다음 손가락을 빨아먹게 한다. 또는 알파벳이 적혀있는 과자를 준비하는 학교도 있다. 어린이들에게 손가락으로 알파벳을 찍어서 빨아먹도록 한다. 이것은 모두 공부는 즐겁고 달콤한 일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것이다. 어릴 때 받은 이런 인상은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고 계속된다. 그럼으로써 공부에 대한 혐오감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비교할 때 우리의 현실은 너무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어린이나 중학생이나를 막론하고 너무 힘겨운 공부를 하고 있다. “지긋지긋한 것이 공부”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 그러기에 일단 상급학교에만 진학하면 홀가분한 해방감을 맛본다. 이제 좀 더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기 보다도 그 지긋지긋한 공부에서 해방되었으니 이제는 마음대로 놀아보자는 것이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발견되는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 서로 다른 두 개의 태도를 비교해보자. 어느 쪽에서 우수 두뇌가 배출되겠는가! 유태의 어린이들은 아직 학교에 가기 전부터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광범하게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가정 분위기에서 자라나는 유태의 어린이들은 유태교의 유일신 여호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유태인에게 여호와는 구상화(具象化) 할 수 없는 추상의 영역에 속한다. 이렇게 추상적인 영역에 속하는 여호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구체적인 미지의 세계만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추상의 세계를 탐구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유태인 어린이에게 있어서 눈으로는 볼 수 없으나 확실히 존재하는 여호와를 생각하는 것은 풍성한 지적(知的) 자극이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깊이 생각하고 모르는 것을 탐구하는 태도를 길러준다. 유태인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어린이에게 질문의 기회를 얼마든지 주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가 3세정도 까지는 수동적인 자세로 배우고 주로 모방에 의하여 학습하지만 그 나이를 넘게 되면 퍽이나 적극적으로 나온다. 4세 정도가 되면 이미 단순한 모방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배우려는 자세를 벗어나 능동적으로 질문하고 자발적으로 학습하려고 한다. 유태인의 가정교육은 어린이에게 질문의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하도록 자극한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처음으로 등교하는 첫날 유태인의 어머니는 어린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학교에 가면 훌륭하신 선생님을 만나게 될 텐데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선생님에게 여쭈어라.” 우리나라의 경우와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것 같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는 대개의 경우 이렇게 말한다. “오늘 학교에 가면 선생님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 .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돼.” 어린이가 4~5세경이 되면 이른바 질문기에 들어간다. 눈에 보이는 것마다 무엇이냐고 물어온다. 많은 경우에 어머니를 성가시게 만들거나 당황하게 만드는 질문을 계속적으로 제기 한다. 이것은 어린이가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의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모르는 것을 알려는 호기심이 있기에 어린이들은 어른의 세계를 배우고 마침내 어른이 된다. 그렇게 되면 또 다른 세대가 그들에게 질문을 해온다.




/윤한솔 홍익불교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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