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아침으로 시작한 하루는 왕성하게 활동하는 한낮을 지나 마무리하는 저녁을 거치면 고요히 침잠하는 밤으로 끝이 난다. 한해도 새싹 돋는 봄으로부터 녹음 우거진 여름을 거쳐 열매 맺고 낙엽 지는 가을을 지나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얼어붙는 겨울로 마무리를 한다. 세상에 끝없는 영화나 영원한 젊음은 없으며 계속되는 절정도 없다. 자연의 섭리처럼 흥망성쇠라는 흐름을 따라 세상은 진행되고 결국은 끝이 나고 만다. 꽤나 먼 길을 돌아온 내 삶도 이제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먹이고 살리기 위해 쉼 없이 버둥거렸는데 그만 생존을 위한 일에서는 물러나야 할 때가 왔다. 법률적 정년도 있고 사회적 정년도 있지만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한계를 느끼는 생물학적 정년도 있다. 이달을 끝으로 이제까지 해왔던 생업을 정리하고 은퇴하기로 했다.

서울의 봄이 지나고 군사정권이 들어서 시대는 썰렁했으나 경제 상황은 꽤 괜찮았던 1983년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요즘 같은 취업난의 시각으로는 배부른 소리일 수 있으나 그땐 꽤 혈기 왕성했던 젊은이였으니 월급쟁이의 제한된 생활은 늘 갈증의 연속이었다. 이런 식으로 삶을 소비하는 게 억울하다는 생각에 직장을 그만두었다가, 벌여놓은 일은 변변찮고 가족의 생계는 책임져야 하는 중압감에 다시 월급 생활로 돌아오곤 하는 몇 번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보람과 자부심을 느낄만한 대단한 직장을 가지지도 못했고 스스로 만족할 만한 그럴듯한 성취를 사업으로 이루지도 못했으니 결국은 꿈과 현실이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간신히 균형 잡아 온 세월이었다. 그래도 어쩌면 변변찮은 성능의 자동차로 비포장의 험한 길을 낙오 없이 완주해 낸 것처럼 43년이란 세월을 그럭저럭 자식을 부양해 독립시키고 부모를 거두고 은퇴를 앞두었으니 그다지 운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드물게는 자기가 꾸었던 꿈을 이루고 사는 이도 있고, 더 많은 이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산다. 하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꾸었던 꿈과 이루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잊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니 어느덧 떠밀려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날을 맞고 만다. 돌아보니 내 삶 또한 그랬다. 어린 시절 꾸었던 몇 가지 꿈과는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일들을 전전하며 허둥대고 애쓰다 은퇴를 맞았다.

우리가 삶에서 이루는 성취는 능력 노력 의지 건강 등의 여러 가지 요소가 덧셈이 아닌 곱셈으로 이루어진다. 곱셈의 특성은 아무리 다른 것이 높아도 하나의 0이라도 곱하면 전체가 0이 되고 만다. 성취의 구성요소인 의지가, 혹은 운이, 그리고 건강이 0이라면 사실상 인생의 성취 전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모든 요소가 고만고만하게 최악은 면했기에 여기까지 왔으니 다행스러운 인생이라 생각한다.

우리 세대의 부모들 대부분은 가진 것 없는 맨몸으로 식민시대와 내전이란 거친 시대를 견뎌야 했던 분들이었다. 그런 부모에게서 물려받을 것 없는 자식으로 후진국에서 태어났으나, 사회생활은 중진국에서 하였고, 은퇴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하게 되었으니, 그래도 돌아보면 운 좋은 세대였던 것 같다. 몇십 년은 출근하기 싫어 버둥거리다, 은퇴하고 나면 나머지 날들은 출근하고 싶어 몸살이 난다고 한다. 마침내 그날이 내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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