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눈] 임명옥 우송대학교 교수
외국인들이 참가하는 한국어능력시험을 대비한 특강을 하고 있다. 5월 시험을 신청한 다국적 학생 50여 명이 참여한다. 어느 하루, 쉬지 않고 120분을 강의하는데 학생 한 명이 조용히 나갔다 들어왔고, 그 외 학생들은 수업을 귀 기울이며 들었다. 오전에 정규 수업도 하고, 야간에 개설한 특강이라 필자도 에너지가 많이 소진됐을 터인데, 수업이 재미있어서 2시간이 거뜬했다. 이런 수업은 이중모음이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고 단모음으로 발음되기 시작하면서 혀가 풀리는 것을 느끼면 120분이 다 되었다는 신호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월급 받고 하는 일을 이렇게 기쁨이 넘치게 만들어 주는 학생들이 참 고맙다. 고마움은 커다란 책임을 느끼게 한다. 그러다 보니 실력에 차이가 나는 학생들에게 두루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를 만드느라 분투한다. 만들고 만들어도 고치고 싶어 꿈에서도 고친다. 물론 이런 수업만 하는 건 아니다. 코앞으로 다가온 시험 대비 수업이 아닌 일반 수업은 비에 흠뻑 젖어 있는 장작처럼 학생들의 열정의 불씨를 살리기 어렵다. 그런 수업을 할 때는 에너지를 빵빵하게 채워 수업에 들어가도 수업이 끝날 때는 오장육부 중 뭐 하나라도 떨어져 나간 듯이 속이 헛헛하다.
생각해 보니, 교사는 아니 필자는 어떤 수업을 했는지에 따라, 더 정확하게는 학생의 즉각적인 반응에 따라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다. 이런 수업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저런 수업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런데 아직도 이렇다. 수업에 흥미가 없는 학생들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다양한 이유를 충분하다고 할 만큼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수업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것은 선생의 부족일 거라는 생각에 심리적 동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안해하다 결국에는 학생을 원망하게 된다. 원망하는 마음이 꺼림직해서 학생들을 불공평한 출발선에 서게 만든 사회를 탓하기도 한다.
미안해하다 학생을 원망하는 필자가 보이니, 눈앞에 보이는 또 다른 학생들이 있다. 일 년 넘게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의대생들이다. 학생들이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듣고자 애쓰는 어른을 매체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의대생의 특권이라며 화가 난다는 의견들은 상대적으로 눈에 쉽게 띈다. 전공을 막론하고 기존의 적정하지 않은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4배의 학생을 뽑았다면 최소한 똑같이 절망했을 것이다. 절망 중에 그동안 깨닫지 못한 욕구도 커질 것이다. 학생들의 절망과 선한 욕구를 진심으로 들여다보는 어른이 있으면, 학생들 스스로가 희망을 만들어 낼 것 같다. 전 세대의 사랑과 노력으로 후세는 더 똑똑하게, 더 지혜롭게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수업 중에 집중하지 않고 딴생각하다 핸드폰을 보는 학생들이 있다. 전체를 대상으로 훈계하면 학생들이 달라지는 건 딱 5초, 아니 3초다. 훈계가 무색하다. 그런데, 필자가 어색함을 꾹 참고, 약간 울상으로 학생과 눈 마주치며 ‘수업 재미없냐’고 물어보면 겸연쩍게 웃으며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는다. 대체로 5분 후에 다시 핸드폰에 눈이 가고 손이 간다. 아마 노련한 교사는 그 5분을 놓치지 않고 가장 중요한 것을 설명할 것이다. 힘든 학생들에게는 맞고 틀렸다는 가르침보다 어색한 ‘사랑 한 톨’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