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둘째 주

1975년 4월 11일자 1면.
1975년 4월 11일자 1면.

△8일

1면 머리에 AP통신 발 외신인 '蔣介石(장개석) 총통 急逝(급서)' 제하의 기사가 올라있다.

'제2차 世界大戰(세계대전) 당시 4大聯合國(대연합국) 지도자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로서 1949년 中國(중국) 공산군에 의해 台灣(태만·당시 대만의 지면 한자 표기)으로 밀려나 그 후 26년 간 自由中國人(자유중국인)들의 精神的(정신적)인 지도자로서 台灣을 통치해 온 蔣介石 총통이 5일 밤 11시 50분(한국시간) 폐렴에 뒤따른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逝去(서거)했다. 향년 87세'라는 내용이다.

"내가 평생을 두고 이루지 못 한 본토 수복을 성취해달라"는 게 유언이었다고 한다.


△11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유신 체제 관련 기사인 '高大(고대) 휴교령 軍進駐(군진주)'가 1면 머리를 큼직하게 장식하고 있다.

내용은 '朴正熙大統領(박정희대통령)은 8일 오후 憲法(헌법) 제53조에 의한 大統領緊急措置(대통령긴급조치) 제7호를 발동, 오후 5시를 기해 高麗大學校(고려대학교)에 대한 休校(휴교)를 命(명)하고 同校內(동교내)에서의 一切(일체)의 集會(집회), 시위를 禁止(금지)시켰다'로 요약된다.

앞서 고대생들은 박정희 정권이 영구 집권을 하기 위해 3선 개헌을 강행하자 이를 저지하려고 1969년 6월 12일 신민당과 연대, 대규모 저지 투쟁에 돌입했으나 개헌안이 변칙 통과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1972년 이후 박 대통령이 유신독재를 강하게 밀어붙일 때 역시 고대생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했는데 1975년 봄 서울시내 많은 대학교들이 유신 반대 투쟁을 계획하던 때에도 첫 시위는 고대생들이 시작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1975년 4월 8일 전국에서 고려대 한 곳만 대상으로 했던 긴급조치 7호를 발동, 고대 휴교령을 내렸고 안암동 교정에 진입한 계엄군은 고대생들을 집단 폭행하며 학교를 통제했는데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된 8명의 형을 바로 다음 날이자 판결 18시간 만에 집행해버림으로써 학생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려 했다.


△13일

시대상을 보여주는 기사인 '쥐잡기 投藥(투약)'이 2면의 주요 기사 중 하나로 자리했다.

'忠北道(충북도)는 12일 금년도 제1차 쥐잡기 투약을 30일 오후 7시를 기해 道內(도내) 일원에 걸쳐 농가·비농가·양곡창고·공공건물·軍(군)병영동에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현재 道內에 살아있는 쥐를 3백21만8천마리로 추정하고 이번 투약에서 그 중 65%에 해당하는 2백9만2천마리를 잡을 계획으로 7만7천1백80포의 쥐약을 풀을 계획이다(후략)'라는 설명이다.

/신홍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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