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광장]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마정리에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팝콘이 터져 나오듯 일순간에 하얀 꽃들이 화르르 펼쳐졌다. 망연하게 그것들을 바라볼 시간이 없었다. 이웃집에서 몇 달 전부터 배꽃 수정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일꾼 팀을 꾸리는 중인데 날짜가 다가오자, 이런저런 이유로 십여 명의 일꾼 신청자들이 단체 톡 방을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시 주변 지인들을 수소문하며 부탁해보지만 아, 꽃구경이라니. 4월 중순, TV에서는 전국 꽃 지도를 펼치며 행락객들을 유인했고, 마정리 배꽃 꽃가루받이 일꾼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여기저기로 몸을 돌렸다. 꽃이 벙글수록 마음이 달았다. 늦저녁 모임에서도 여기저기 전화를 넣느라 자꾸 자리를 이탈하니 회장님도 걱정이 되는지 몇 군데 전화를 돌리더니 대학원생 외국인 일꾼 세 명을 구해주었다. 라오스에서 유학 온 부부와 인도네시아에서 온 대학원생 세 명이 함께 했다. 바쁠 때는 부지깽이도 뛴다고 하지 않던가. 코앞에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남편도 배 밭에 뛰어들었다. 팔, 다리 달린 사람은 누구라도 환영이다. 외국인 근로자가 아니면 농사지을 수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우리는 며칠 동안 꿀벌이 되어 부지런히 화분을 꽃술에 날랐다.

낮에 ‘웅성가임’을 한 배 밭을 고즈넉이 바라보며. 밤늦도록 수런대는 그곳에 귀를 쫑긋했다. 식물 화분이 꽃가루받이를 통해 정상적으로 난세포를 만나 수정이 되는 은밀한 밤이다. 쉿, 바람이 그들의 내밀한 속삭임을 싣고 언덕을 오르내린다. 등을 켜 놓은 듯, 하얀 구름이 지나가는 듯, 환하게 피어있는 배꽃이 밤길을 밝힌다. 이제야 비로소 식물도 사람과 다름없는 생명체라는 것을 실감한다.

겉옷 하나를 더 걸치고 과수원 곁길을 걸었다. 시냇물 내려가는 소리가 정답다. 그러다가 문득 날씨가 걱정된다. 이상기온으로 추워지면 꽃들이 견디지 못할까 봐 깜깜한 하늘로 손을 휘저어 본다. 괜찮겠지. 한 덩이 배를 만드는 과정도 녹록지 않다. 간절한 마음과 어깨가 빠질 듯한 노동, 그리고 수 없는 발자국, 해충과의 전쟁, 배가 그냥 저 혼자 둥그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무엇보다 때를 맞추는 일이 중요한데 모든 배나무 과수원 농가에서 같은 시기에 사람을 필요로 하다 보니 배꽃필무렵에는 돈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인력난으로 야속하기만 하다. 배꽃 축제는 꿀벌 같은 사람들이 배나무밭 안에서 하면 얼마나 좋을까.

며칠 후 구름이 덮인 듯 온통 새하얗던 배나무밭이 푸릇해지기 시작하여 들여다보았더니 포도송이만 한 열매들이 보였다. 웃으면서 눈물이 났다. 예쁘다. 밭 주인이 흰 봉투에 품삯을 넣어 가져왔다. 애당초 품값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난해 농사지은 배와 배즙을 얻어먹은 게 얼마인가. 손사래를 치니 돌아가서 열무김치를 한 통 가져왔다. 고추장, 참기름 넣고 열무김치를 비벼 먹으며 그런 것들이 모두 농부의 손에서 길러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사람이 사람을 만드는 일만큼이나 꽃과 꽃 사이를 오가며 웅성가임을 통해 배를 만드는 일도 위대하다. 이 모두가 사람이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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