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칼럼] 박성규 한의학 박사·예올한의원 원장

21세기를 맞이하던 1999년은 혹세무민하는 주장들이 난무했다. 서기를 기준 삼던 서구권에서는 세기말이 되면 으레 종말론이 등장했었다. 우리가 아홉수를 꺼리는 것과 같은 심리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 년도가 확실치 않으며 서기 1년이 아닌 것은 정설로 인정된 20세기에도 세기말에 이르러 종말론이 등장한 것은 아이러니하다. 인간 심리는 이성과 합리의 영역 밖인 듯하다.

종말론과 함께 ‘밀레니엄 버그’에 대한 공포도 확산됐다. 컴퓨터에서 1999년을 99년으로 통상 줄여서 기록했는데 2000년이 되면 00년이 되어 자료에 혼란이 초래되고 전체 컴퓨터의 오류를 야기한다는 주장이었다. 컴퓨터 보급이 확산되고 인터넷이 일상에 들어오던 시기여서 밀레니엄 버그설은 많은 우중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자산 증발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컸다. 종말론과 밀레니엄 버그는 대중 매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어 많은 사회 비용을 지출하게 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백두산 분화설로 전 국민이 공포에 떤 적도 있었다. 고려 초 백두산이 대규모로 분화하여 상층부 몇 백미터가 사라졌다. 발해는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고려에서는 인지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분화할 듯 야단법석이었지만 아직 아무런 징조도 없다. 실제 분화가 일어나도 만주 북한 그리고 일본의 일부 지역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무런 피해가 예상되지 않는 남한에서 호들갑을 떤 것은 우중을 농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18개국의 연구진이 참여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생로병사의 비밀을 완전히 파악해 장수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며 막대한 자금을 갈취했다. 2000년 6월 마침내 게놈 프로젝트는 완료됐지만 장수의 꿈은 요원한 문제가 됐다. 생물학 발전에 기여한 바 크지만 과장 허위 광고였음은 틀림없다. 환원주의의 오류를 스스로 드러낸 사건으로 ‘과학 미신’에 기대어 돈벌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전공의들이 의대 정원 증원에 반발해 병원을 떠난 지난 1년간 ‘초과 사망자’가 유의미하게 증가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왔다. 김진환 서울대 보건환경연구소 교수와 김새롬 인제대 예방의학교실 교수가 공저한 논문에서 2024년 3~12월 사망률은 고령화 요소를 반영하면 의료 공백으로 인한 초과 사망은 없었다고 발표했다. 초과 사망이 의료계나 대중매체의 협박처럼 높지 않았던 원인으로는 ‘과잉 의료 중단’이 꼽힌다. 김 교수는 “의료 현장에서는 환자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르는 수술이라도 일단 시행하는 경향이 있는데 의료 대란으로 과잉 의료가 멈췄다”며 “불필요한 의료 개입이 감소하면서 생존율이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의료 파업으로 의료 공백이 발생하면 오히려 사망률이 감소하는 현상은 이미 세계 각국에서 누차 경험한 바 있다. 의료 공백 기간이 길면 길수록 사망률은 현저히 감소했다. 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양방 의료계가 얼마나 많은 과잉 의료를 자행했는지 보여준다. 더불어 의료 파업이 국민 보건이나 건강에 치명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번 기회에 양방 의료계의 만성적 과잉 진료를 저지할 방법과 자가 건강 관리법을 효과적으로 보급할 방법 또한 강구해야 한다.

의료 파업은 찻잔 안 태풍에 지나지 않는다. 의료 공백을 협박 삼아 의료 개혁을 저지하고 나아가 더욱 많은 이권을 탐하는 이들을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국가에서 배타적 면허를 보장한 것은 국민 보건과 건강을 제고하여 국가 안전망을 공고히 하려는 것이지 저들의 알량한 권능에 굴복한 것이 아니다. 근거 없는 협박에 굴복하여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지 못하는 것은 무지하거나 이권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민 상당수가 적어도 조선 왕 정도의 식견을 갖추어야 발전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중우정치로 전락하여 모리배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선전 선동에 취약한 국민은 자유와 안전 그리고 풍요를 빼앗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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