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눈] 노기섭 홍익대학교 소프트웨어융합학과 교수
우리는 손 안의 기기로 거의 모든 정보를 관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전화번호부, 지도, 사전, 계산기, 수첩까지 스마트폰 하나면 해결되는 세상이다. 기술의 발전은 분명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그 이면에는 한 가지 조용한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바로 ‘기억의 외주화’다.
기억의 외주화는 자신이 직접 기억하지 않고 디지털 기기나 외부 저장소에 의존해 정보를 관리하는 경향을 말한다. 예전에는 친구의 전화번호를 여러 번 부르며 외우던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이제는 번호를 저장해 두고는 더 이상 기억할 필요조차 없다. 이는 단지 전화번호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근 학생들과의 수업 중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의 전화번호를 외우느냐”는 질문에 다수가 “스마트폰에 저장돼 있어 외울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디지털 기기가 일상화되면서 우리의 뇌는 ‘기억’이라는 기능을 점차 덜 사용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 능력과 뇌 기능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신경과학자들은 ‘반복적 기억 훈련’이 장기 기억뿐 아니라 사고력, 창의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 강조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더 가속화되고 있다.
필자 역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업무를 하며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예전에는 일주일 내내 붙잡고 있어야 가능했던 기능 개발과 테스트 작업이 이제는 AI의 도움을 받으면 이틀이면 충분하다. AI가 자동으로 소스코드를 생성해주고, 내가 짠 코드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을 알려준다. 나같은 개발자는 그저 복사해 붙이고 로직(논리)만 살짝 수정하면 된다.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AI가 생성해 준 코드를 반복해서 적용하다 보니, 정작 스스로 처음부터 코드를 짜려 하면 손이 멈춘다. 예전엔 몸에 익었던 문법이나 알고리즘이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전화번호를 읽을 줄은 알지만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고, 한자 주소를 볼 수는 있지만 직접 쓰지 못하는 것과 같다. 코드 역시 외부에 ‘기억을 외주’한 셈이다. 기술의 도움 속에 인간 고유의 능력이 무뎌지는 순간이다.
기억의 외주화는 편리함과 함께 우리에게 숙제를 남긴다. 특히 청소년이나 대학생처럼 인지 능력이 한창 발달하는 시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교육의 목적이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가공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면, 기억력의 훈련은 여전히 중요한 학습 요소다.
AI는 분명 우리가 직면한 시대의 핵심 기술이며, 앞으로의 사회를 이끌어갈 강력한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는 사람이다. 우리가 디지털 도구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면, 인간 고유의 사고력, 창의력, 손끝의 감각은 점점 희미해질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능력이 완전히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 기억하고 생각하는 능력, 손으로 쓰고 직접 만드는 경험은 여전히 우리가 지켜야 할 핵심 역량이다.
오늘 하루, AI가 아닌 내가 만든 코드를 한 줄 써보고, 스마트폰 없이도 중요한 사람의 번호를 외워보는 건 어떨까. 작지만 소중한 기억의 훈련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지키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