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구성하는 것은 철근과 콘크리트가 아니다.
그 속에 담긴 합의의 원칙과, 제도를 지키는 행정의 신뢰다. 대전 도안 2-9지구 초고층 주상복합 추진 논란은 도시계획이라는 약속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문제는 건물의 용도가 아니다. 도시의 질서를 계획 아닌 '청탁'으로 바꾸려는 시도에 있다.

먼저 시행사의 주장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하다. 정주 기능이 부족하다, 시대가 달라졌다, 공공기여도 하겠다. 하지만 이는 본질을 교묘히 비켜간다. 만약 이 논리가 받아들여진다면, 계획의 기준은 더 이상 '공익'이 아니라 '사익'의 소리 크기로 결정된다. 지금은 하나의 블록이지만, 다음엔 두 번째, 세 번째 구역까지 '예외'를 요구할 것이다.

도안 2-9지구는 여느 개발 예정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도안신도시의 기능적 설계를 견고히 지탱하는 핵심 구간이다. 이곳이 주거용으로 전환되면, 상업·업무 기능은 무너지고, 전체 도시구조는 정체성을 잃는다. 그런데도 대전시는 상황을 관망하고 있다. 행정의 방관은 결국 설계자의 취지를 거슬러, 스스로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공공기여'라는 구태의연한 면죄부다. 수백 세대 아파트를 짓고, 대신 육아지원센터 하나를 내놓겠다는 식의 접근은 시민을 기만하는 계산이다. 애초에 기반시설 계획이 포함되지 않은 고밀도 주거시설을 밀어 넣고, 부작용은 세금으로 메우게 만드는 방식은 공공성을 훼손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문제는 행정의 형평성이다. 계획대로 사업을 진행한 시행사는 손해를 감수했고, 예외를 받아낸 쪽은 이익을 본다. 행정이 특정 사업자의 요구에만 문을 열어준다면, 이는 공정성을 위협하는 '행정 특혜'가 된다. 시민은 불신하고, 시장은 왜곡된다.

도시는 타협으로 지어지는 곳이 아니다. 원칙을 흔드는 순간, 그 여파는 전체 구조를 무너뜨린다. 지금 대전시는 개발과 원칙 사이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명확하다. 설계된 도시계획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예외를 허용해 도시의 질서를 민간의 논리로 전락시킬 것인가.

2-9지구는 작은 땅이지만, 도시 행정의 미래가 걸린 시험대다. 도시계획이 무너지는 방식은 늘 같다. 처음엔 예외였고, 나중엔 관행이 된다. 지금은 명확한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침묵은 곧 승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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