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7월 첫째 주

1975년 7월 2일자 3면.
1975년 7월 2일자 3면.

△2일 - '판문점 도끼 만행'의 전조

이날 3면에는 소위 '막 나가던' 북한의 모습을 보여주는 '美(미) 장교에 集團暴行(집단폭행)' 제하의 보도가 주요 기사로 올라가 있다.

'30일 오후 4시10분께 군사정전위 제3백64차 본회의가 열리고 있는 판문점에서 경비임무를 지휘하던 美軍(미군) 판문점 전방지원사령부 부사령관 윌리엄 D 헨더슨 소령이 북괴측 경비병과 기자들에게 구둣발로 짓밟히고 가슴을 차이는 등 중상을 입고 헬기편으로 서울 121후송병원으로 옮겨졌다. 본회의가 거의 끝날 무렵 헨더슨 소령은 내리는 비를 피해 중립국 감독위원회 회의실 옆 벤치에 앉아있었는데 이때 北傀(북괴) 기자 한철(가명 배성동)이 다가와 벤치에 놓아둔 헨더슨 소령의 모자를 가리키며 치우라고 시비하자 다른 북괴 기자들이 몰려와 헨더슨 소령을 삥 둘러싸고 사진을 찍고 희롱하며 떠들어댔다. 헨더슨 소령이 북괴 기자들을 피하려고 『입을 다물라』며 타이르듯 말하고 모자를 집어들고 일어서자 한철이 갑자기 달겨들어 헨더슨 소령의 배를 주먹으로 치고 이어 부근에 둘러싸고 있던 북괴 기자와 경비병들이 합세, 헨더슨 소령을 넘어뜨리고 구두발로 얼굴과 목을 짓이겨 밟았고 1백여명의 북괴 경비병들이 몰려들어 『죽인다』고 소리치며 폭행난동을 부려 헨더슨 소령은 실신한채 움직이지를 못했다. 이때 자유의 집 앞에서 헨더슨 소령이 폭행을 당해 쓰러져 있는 것을 본 유엔측 경비병 등 50여명이 일제히 현장에 달려가 헨더슨 소령을 구하려 했으나 주먹을 휘두르며 덤비는 북괴 경비병들 때문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북괴병들은 아무나 닥치는대로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는 등 난동을 부렸으며 유엔군 사령부 보도실 소속 패트리셔 커랜 양 턱을 주먹으로 갈겼으며 커랜 양이 카메라를 떨어뜨리자 발길로 걷어차고 짓이겨버렸다. 이와같은 난동으로 회담은 10분간 중단됐었으며 회의가 재개된 후 북괴측 대표 金豊燮(김풍섭)은 『무력도발을 임삼는 것은 유엔측이다. 지금도 보지 않았느냐』고 회의 절차를 무시하며 난동의 책임을 미군에게 덮어씌우려 했다'는 내용이다.

기사를 요약하지 않고 전문을 그대로 옮겼는데 이는 이 사건 1년 뒤 8월 18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판문점 도끼 만행'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판문점 도끼 만행'은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벌목을 지휘하던 미국인 유엔군 장교 2명을 북한군이 살해한 사건이다.

당시 유엔군은 자신들 2개 초소 사이에서 시야를 가리는 이 나무를 베어내려다 북한군이 이의를 제기하자 가지치기만 하기로 하면서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런데 추가로 현장에 병력을 이끌고 나타난 북한군 장교 2명이 중단 요구를 했지만 방금 전 북한군이 허용한 상태였기 때문에 유엔군이 작업을 계속하자 북한 장교 2명 중 1명의 신호에 북한군은 가지고 온 둔기를 비롯해 한국인 노무자들이 쓰던 도끼로 갑자기 집단폭행을 가했다.

습격을 당한 유엔군 장교 중 1명은 현장에서, 1명은 이송 중 사망했고 이 사건으로 분노한 미국에 의해 북한은 자칫하면 지도에서 사라질 뻔했을 정도로 분위기는 살벌하게 흘러갔다.

이때 습격 신호를 보낸 이가 상기한 헨더슨 소령 집단구타 당시 북한군의 주도자이기도 했다.

/신홍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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