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생각하며] 황혜영 서원대 교수
우리는 흔히 높고 거창한 것을 추종하지만, 때로는 낮고 미미한 것이 위대한 통찰을 주기도 한다. 맨바닥에 붙어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이끼도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오랜 생존의 지혜를 전하는 것 중 하나다. 화려한 꽃도 우뚝한 키도 없이 단조로운 이끼가 식물학적으로는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끼는 생태계 최초의 정착자이다. 이끼에는 물과 양분을 흡수하는 진정한 뿌리 대신 몸을 땅에 고정하는 헛뿌리만 있다. 진정한 뿌리는 양분을 흡수할 수 있는 일정량의 토양이 필요하지만, 고정 기능만 하는 헛뿌리는 척박한 땅에도 너끈히 뻗어갈 수 있어, 이끼는 다른 식물들은 살 수 없는 메마른 땅에 선구적으로 정착해 삶의 터전으로 개척한다. 최소 기능의 헛뿌리로 아낀 에너지로 생장에 집중하는 이끼는 나만의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아껴야 할 에너지와 집중해야 할 영역을 돌아보게 한다.
이끼는 일단 땅에 정착한 뒤로는 차츰 바위 표면을 풍화시키고 유기물을 축적하여 얕은 토양층을 만들어 다른 생명이 살아갈 기반을 마련한다. 자신이 개척한 땅에서 다른 생물들을 살리는 조력자 이끼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게 남을 돕는 손길을 비추는 생태 거울이다. 불굴의 개척 정신으로 자신의 삶을 일구고 다음 세대와 공동체를 세워가는 선구자적 이타 정신이 이끼의 생태와 공명한다.
이끼에는 물과 양분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물관과 체관이 없어 크게 자라지 않고 바닥에 붙어 있다. 이끼는 온몸을 던져 토양을 만들어 화려한 꽃과 나무들의 터전을 마련해주지만, 정작 자신은 식물들의 치열한 생존 경쟁 아래로 물러나 늘 낮고 축축한 자리에 몸을 뻗는다. 위로, 더 위로 높아지고자 하는 세태에 이끼는 몸을 낮추어 경쟁과 다툼을 피하고 타고난 본성을 보존하는 겸손의 혜안을 말한다.
이끼는 혹독한 환경에 저항하는 대신 환경에 자신을 맞춘다. 이끼는 주변의 습도에 따라 몸의 수분을 조절하는 변수성 식물이다. 혹독한 가뭄에는 활동을 거의 멈추고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한다. 죽은 듯 보이지만 수분을 만나면 이끼는 스펀지처럼 물을 흡수하여 놀라운 속도로 생기를 되찾는다. 다른 식물들은 말라 죽어도 이끼는 살아남는 비결이 환경에 체질을 동화하는 생존력 덕분이다. 죽은 듯 웅크리고 숨을 고르는 시간도 삶의 일부로 품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 이끼에서 배우는 시련을 견디는 비결이다.
지구 거의 전 기후대에 번져나간 이끼의 유산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억 년에 걸쳐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더디게 가장 척박하고 극한 환경조차 온몸으로 껴안아 왔다. 이끼,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에 안달하는 우리에게 시간 위에 축적되는 위대한 저력을 들려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