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사색] 정우천 흥덕문헌연구소장

40년이 넘게 생업을 위해 절제하고 인내해 온 ‘현재의 나’에게, 그 시간을 잘 견뎌온 ‘과거의 나’가 주는 선물이란 마음으로 은퇴 여행을 다녀왔다. 이탈리아 남부의 몰타에서 시칠리아를 거쳐 북부의 돌로미테까지를 종주하는 40여 일의 짧지 않은 일정을 친구 부부와 4명이 일행이 되어 함께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주위에서 들은 가장 많은 말이 가족도 아닌 일행과 긴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여행 중 서로 다퉈 불편함은 없었느냐는 질문이었다.

여행을 같이 가봐야 그 사람의 진실한 실체를 알 수 있다는 말부터, 지인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가족끼리도 여행 갔다가 원수가 되어 돌아온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생활 배경이나 성격이 다른 타인과 같은 공간에서 같이 움직이며 여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은 수없이 많다. 더욱이 이번 여행은 숙식을 모두 B&B에서 해결하고 렌터카로 움직여 24시간 내내 붙어 지냈으니 위험 요소는 더욱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 친구와 우리 부부는 즐겁게 잘 지내고 돌아왔으며 돌아와서는 같은 추억을 공유한 사람으로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물론 여행 중 사소한 감정적 위기는 있었고 그 위기를 극복하려는 각자의 더 큰 자각과 인내가 있었으므로 좋은 결과가 왔음은 당연하다. 좋은 인간관계란 노력 없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가 끝나가는 대표적인 신호는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왔는데 나에게 이럴 수 있냐.’라며 상대에게 해준 것만 기억하는 것이라고 한다. ‘원한은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라’라는 속담과는 정반대의 행태이다.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베푼 것은 잊어버리고 받은 것은 잊지 말라는 말일 텐데 파경에 흔히 나타나는 속성은 이와 정반대이다. 타인의 단점은 잘 보인다는 뜻으로 ‘인간은 단점을 등에 지고 다닌다’라는 말도 있는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잘못은 잘 모르고 타인의 단점만 크게 보고 서운해하고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아주 단순한 진리는 내가 베푼 것보다 내가 받은 것을 잊지 말고, 상대의 단점보다 장점을 더 크게 보는 것이 최고의 방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생존하는데 은혜는 잊어도 크게 문제 되지 않지만, 원한을 잊으면 생존에 큰 위협이 된다. 그래서 은혜보다는 원한을 기억하는 쪽으로 인간은 진화해 왔고 이에 본능적으로 익숙하게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상대의 장점을 높게 보고 원한보다 은혜를 기억하는 것은 훨씬 힘들고 인간의 본성을 이겨내야 가능하다. 결국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覆水不收(복수불수)'라는 라는 동양 고사성어가 있는가 하면,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라는 같은 뜻의 서양 속담도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번 망가진 관계를 회복하기는 매우 어려우니 늘 조심하고 신중해지라는 뜻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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