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사색] 정우천 흥덕문헌연구소장
동창회 행사에서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만났다. 함께 어울려 다니며 그 또래의 걱정을 나누며 한 시절을 같이 보냈던 친구였다, 졸업 후 각자 다른 대학으로 진학하게 되며 한동안은 당시의 거의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요즘 같은 스마트 기기가 없는 시절이었으니 점점 소원해지다 각자의 생활이 바빠 연락이 아주 끊어져 버렸을 것이다. 몇십 년 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꽤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친구는 좋은 품성에 진솔했다. 반가움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서로는 묘한 어색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기도 했고 기억하는 과거의 상대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해서일 것이다. 사실 사람은 늘 변한다. 학창 시절의 개구쟁이가 성직자가 되기도 하고, 죽도록 사랑해 결혼한 사람과 원수로 헤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세월과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며, 원래의 사람과 변한 사람은 동일인이면서도 어떤 면으론 다른 사람이다. 너무 변해버렸어도 낯설지만, 변함없이 그때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이었어도 역시 이상하다.
변화와 동일성에 대한 철학적 사고실험으로 ‘테세우스의 배’라는 명제가 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인 테세우스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 아이들을 구출해 돌아왔다. 이후 아테네인들은 그 일을 기념해 배를 영구 보존하기로 하고, 판자가 썩으면 새 판자로 교체하며 그 배를 보존했다. 이렇게 새 판자로 계속 교체하다 보면 언젠가는 배의 모든 부분을 교체하는 날이 온다. 그렇게 “모든 부품을 교체했어도 그 배를 원래 배와 같은 배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이 명제이다.
커다란 배에서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면 당연히 같은 배일 것이다. 하지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원래의 배 조각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가 온다. 그렇게 변화된 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이 명제는 “교체하면서 떼어낸 부품을 모두 모아 두었다가 이것으로 배를 다시 조립한다면, 그것은 테세우스의 배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변한다는 것과 어떤 변화까지를 동질성으로 인정할까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문화재 복원, 물건의 변상, 또 뇌사상태에 대한 존엄사 인정 등도 동질성에 대한 해석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 구별하기 힘든 복제품은 비슷해도 동일한 물건으로 볼 수 없지만,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나무는 모습이 달라도 동일한 나무이다. 결국 기능과 존재 목적, 사용자의 동의 등이 동질성의 판단기준이 된다. 변화의 과정을 지켜보고 이해했느냐,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니 과정을 보지 못해 이해하지 못한 변화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도 그래서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