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산책] 김법혜 스님·철학박사·민족통일불교중앙협의회 의장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베버리지의 사회보장보고서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인생의 시작(요람)부터 끝까지(무덤)를 의미하는데 복지국가의 사회보장 제도에서 국민의 삶을 전 생애에 걸쳐 보호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빈곤, 질병, 무지, 나태, 불결 등 사회적 위험을 국가가 책임지고 국민의 삶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제목인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진다는 복지국가의 방향과 슬로건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한 기업주가 정부와 노동계에서 해마다 근로자에 대한 최저임금을 협의할 때 노인에게도 노동자 대우를 받도록 하는 이색 청원을 건의해 눈길을 끌었다. 최저임금법에 따른 동일 임금을 주는 경우 "고용주는 노인보다 젊은 층을 선호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동일 임금 체계 속에서는 노인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실정” 이라며 최저임금 적용 제외 대상에 노인층도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최저임금법과 시행령을 개정 필요성을 주장해 돋보였다.

현행 최저임금법은 ‘개인 가정에 고용된 가사사용인(도우미), 선원,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 능력이 현저하게 낮은 자’까지 적용되고 있어 여기에 ‘노인’도 추가하자는 얘기다. 우리나라는 초고령화 시대에 접어 들었으나 여전히 사회복지제도 하에서 노인들은 최저임금과 관계없이 노후생활을 위한 일자리도 많지 않을뿐 아니라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받지 못하고 있다.

노인 일자리는 정년 연장문제 등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으며 노인 현실은 생각보다 가혹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20년 기준 66세 이상 노인 인구의 소득 빈곤율은 40.4%이며, 38개 회원국 노인 빈곤율 평균 14.2%의 3배에 이르고 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노인들은 가난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일자리 부족과 최저임금 수준 또는 저임금으로 노인 빈곤의 주범이 되고 있고 급기야 노인 자살율까지 높이고 있다.

노인빈곤율과 자살율을 낮추기 위한 해법으로는 노인에게 일자리의 제공과 일정한 임금수준 그리고 사회복지의 확대가 시급하다. 이미 아파트· 건물 경비원, 청소 미화원, 돌봄 등 일부 직종은 노인 일자리로 각광 받고 있는지 오래다. 한편으로는 노인들의 빈곤도 빈곤이지만 나이 들어서도 계속 일을 하려는 이유가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적 현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현장에 가서 보면 단순히 금전적인 필요 이외에도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아직은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 가슴 깊숙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돈벌이도 중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 그 자체가 보약이 된다는 게 노인들의 주장이다.

깊이 공감되는 말이다. 노인들은 일자리가 없으면 체력이 눈에 띄게 떨어진다. 노인들에게 일자리는 자존감을 지켜주는 버팀목이다. 꺼져가는 내 삶에 불씨를 지필 수 있고 퇴직하고 나서도 내가 여전히 유용한 존재라는 자부심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성공에 목말랐던 과거와 달리 노인들은 일자리에서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 만으로도 만족스러워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일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는 자체가 생의 또 다른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나이 든 사람이 일하면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나이 들어서 하는 일은 생계 때문’ 이라거나 ‘나이 들면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것과 같은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 사회가 노인 일자리를 인생 후반의 중요한 영역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각자의 방식대로 일을 이어 나가는게 건강하고 현명한 노후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이 현실에 맞는 노인복지 정책을 속히 수립·추진해 위축된 노년층의 존엄성을 세우고 지켜줘야 한다. 초고령화 100세시대, 생계와 생활은 물론이거니와 자아실현을 위해 정년 연장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적 합의를 서두를 필요가 있다. 이제 노인들은 안정된 복지선진국을 바라고 있다.

사회구성원 모두 ‘누구나 노년이 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노인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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