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보훈이 만난 시민 러닝 캠페인 '지구런'
묘비를 닦고 길을 달리며 "기억은 행동으로 완성된다"
세대가 함께 만든 새로운 형태의 사회공헌 러닝

▲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지구런 현충원 환경봉사 & 보훈 챌린지’ 참가자들이 묘역을 정화하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지구런 현충원 환경봉사 & 보훈 챌린지’ 참가자들이 묘역을 정화하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국립대전현충원은 이날 유난히 고요했다. 하지만 그 적막을 깨는 리듬이 있었다.

묘비 사이를 스치는 발걸음, 돌계단을 오르는 숨결, 그리고 땅을 밟는 러닝화의 규칙적인 소리. 달리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손에 장갑을 끼고 묘비를 닦았고, 누군가는 발끝으로 흙길의 낙엽을 밀어냈다. 그들의 땀방울은 '운동'이 아니라 '기억의 행위'였다.

25일,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지구런(Earth Run) 현충원 환경봉사 & 보훈 챌린지'는 운동과 봉사, 추모가 한 무대에 오른 색다른 러닝 캠페인이었다. 이 행사는 사단법인 대한참전유공자환경봉사단이 주최하고, '지구런' 플랫폼이 주관했다. 러너들은 4000여 기의 묘비를 닦으며 참전용사들의 이름을 손끝으로 어루만졌고, 그 길을 달리며 '기억의 러닝'을 완성했다.

▲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지구런 현충원 환경봉사 & 보훈 챌린지’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참배길과 묘역 주변을 달리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지구런 현충원 환경봉사 & 보훈 챌린지’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참배길과 묘역 주변을 달리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참여자들의 표정은 밝았지만, 그 안에는 묵직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한 참가자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말했다. "달리기를 좋아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어요. 묘비를 닦다가 오래된 이름을 봤을 때, 그분이 지금의 우리 세대를 지켜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순간 달리기가 운동이 아니라 감사의 표현이 됐어요."

또 다른 참가자는 "세대가 다르다는 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청년과 어르신이 함께 달리고, 함께 쓰레기를 주우며 같은 리듬으로 호흡했어요. 이게 진짜 세대가 이어지는 순간이구나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한참전유공자환경봉사단 전병권 총재는 "보훈은 기억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 마음을 행동으로 이어야 한다"며 "오늘의 행사가 시민 참여형 보훈문화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지구런 관계자는 "이번 프로그램은 러너들이 달리며 환경을 지키고, 국가유공자의 희생을 마음으로 새기는 사회공헌 모델"이라며 "지역에서 시작된 이 움직임이 전국으로 확산돼, 러닝이 나눔의 새로운 언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행사에는 시민 러닝 크루 '런포레멤버', '스탭포워드', '히어로즈환경봉사러닝', '러너즈' 등이 참여했다. 서로 나이도, 직업도, 출발선도 달랐지만, 모두가 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현충원 언덕길에서 뛰던 한 러너는 숨을 고르며 이렇게 말했다. "그 길은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그만큼 아름다웠어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지구런은 환경보전, 시민건강, 보훈의 가치를 잇는 지속가능형 러닝 플랫폼이다. 이번 현충원 캠페인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달리며 봉사하는 사회공헌형 러닝 챌린지'를 이어간다. 지구를 지키는 발걸음,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을 기억하는 걸음이 한길 위에서 맞닿았다.

그날 현충원을 달린 사람들의 땀은 말보다 깊은 언어로 남았다.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기억으로 쓰인 헌사였다. /대전=이한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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