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광장] 이재훈 시인·건양대 교수
필자는 매주 기차를 타고 서울과 대전을 오간다. 이런 삶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어느새 적응하여 살고 있다. 시간이 급할 때는 KTX를 타지만 무궁화호도 제법 많이 이용한다.
기차를 타는 것은 다른 교통수단과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일종의 여행을 떠나는 느낌이랄까. 특히 무궁화호를 타면 더욱 그렇다. 왠지 삶은 달걀과 김밥과 사이다를 먹어야 할 것 같다. 차창 밖의 풍경을 보면 이 기차는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의 감각을 다르게 변화시킨다. KTX가 나온 이후 무궁화호의 느림이 견디기 힘들었다. KTX의 속도에 적응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기차의 시간은 견뎌야 하는 일상의 시간이 아니라 여행하는 시간이라고 생각을 바꾸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오늘은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는 것이며 퇴근하는 것이 아니라 밤기차를 타고 떠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여행의 시간은 KTX의 시간이 필요 없다. 잠도 자고 설렁설렁 드라마도 보고 가끔씩 졸기도 하는 여유가 필요하다.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무궁화호가 제격이다. KTX는 너무 빨라서 풍경을 시야에 넣기도 전에 흘러가 버린다.
따지고 보면 KTX는 조급함만 주었다. 졸다가 대전에 내리지 못하고 익산까지 가서 다시 되돌아온 적도, 비가 오고 연착이 된 것도, 강의 시간에 지각을 해서 발을 동동 구른 적도 모두 KTX에서였다. 무궁화호는 느리고 배차시간이 길기 때문에 여유 있게 표를 구한다. 그래서인지 지각을 해본 적이 없다. 느린 시간이 오히려 빠른 시간으로 변하는 아이러니를 자주 경험한다.
무궁화호는 사람 냄새가 난다. 저렴한 가격 때문인지 특히 어르신들과 학생들이 많이 탄다. 캐리어를 들고 타는 대학생, 농작물 보따리를 들고 탄 할머니, 불콰하게 낮술을 한 동네 아재, 지방으로 이동하는 외국인 노동자 등을 보고 있으면 오랜만에 맡은 사람 냄새가 진하다. 그 속에는 노동과 그리움과 꿈의 냄새가 배어있다.
무궁화호에 관한 추억은 밤새 얘기해도 모자랄 듯하다. 대학에 낙방하고 울적한 마음으로 힘들었던 나를 부산 해운대로 데려가 주었던 무궁화호. 그때의 새벽 포장마차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논산에서 서울로 일을 하기 위해 상경했던 무궁화호. 한강대교를 지나면서 63빌딩이 보이기 시작하면 가슴이 뛰곤 했다. 군대시절 서울에서 놀다가 돈이 떨어져 무작정 탔던 무궁화호. 차장에게 군대 휴가증을 보여주며 사정을 얘기했더니 그냥 눈 감아 주었다.
때론 느린 시간이 지금보다 나은 시간이 될 때가 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벗어나 잠시 느린 시간을 살고 나면 그동안 안 보이던 것들이 자꾸만 보이게 된다. 일상이라는 것, 기억이라는 것, 꿈이라는 것, 풍경이라는 것들의 미덕을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