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산책] 김법혜 스님· 민족통일불교중앙협의회 의장
현대인들의 삶의 속도가 점점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무엇이든 빨리 빨리 해 내는 것이 능력으로 평가받는 세상이다 보니 주위를 세심히 살피고 배려하는 데는 무심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많아져 간다.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얘기 중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격언이 있는데,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유래되었다. 내전을 수습하고 팍스 로마나의 기틀을 세운 그는 라틴어로 ‘festina(서두르다)’와 ‘lente(천천히)’를 결합한 말로 ‘천천히 서둘러라’를 인생의 좌우명이자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신중하면서도 민첩하게 움직이라’는 의미로 올바른 판단과 타이밍, 신중한 속도의 미덕을 강조했다. 그의 전기에는 ‘천천히 서둘러라, 용맹보다 침착이 낫다’는 표현도 나온다.
인공지능(AI)이 불러온 가속화 시대, 조급함이 일상을 지배한다. 조급증으로 인해 국민 74%가 1년 새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했다는 조사도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시점에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자. 최근 일부 정치권과 민주노총 산하 전국택배노조가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이른바 ‘초심야 택배 배송’을 중단하자는 제안을 내놓자 ‘새벽 배송 금지’ 논란에 불이 붙었다.
택배 노조 주장의 취지는 택배 노동자의 과로 방지와 건강권 보호다. 그러나 현장의 많은 택배 기사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새벽 택배 배송 금지’ 제안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되묻고 있다. 일부 새벽 배송 위탁 택배 기사 1만 여명이 소속된 영업점 단체가 야간 새벽 배송 기사 2천40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93%가 ‘심야배송제한’을 반대한다고 답했다.
이들은 교통이 한산하고 주차가 수월하며 근무 시간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야간 근무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낮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2018년 5000억원 정도였던 새벽 택배 배송 시장 규모가 올해 15조원으로 7년 만에 30배나 늘었다. 새벽 택배 배송은 이미 2000만명이 넘는 소비자가 이용하는 생활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택배 기사들은 현행법상 고용 계약을 통해 임금을 받는 근로자가 아니다. 업무 위탁 계약을 통해 수수료를 받는 ‘특수 형태의 근로 종사자’로 분류된다. 세계 최대 물류 업체인 미국 아마존은 인공지능(AI)과 로봇을 도입하면서 1만 4000명을 감원하기 위해 소리 없는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예측을 내 놓았다.
뉴욕타임스는 아마존이 2033년까지 60만 명을 감원할 계획이라고 폭로했다. 건강 보호만 외치다 AI와 로봇, 자율 주행 등 신기술에 밀려 택배 배송 기사라는 일자리마저 사라질지 모를 위기다. 노동자에게 건강권보다 중요한 건 생계, 바로 생존의 문제이다. 일각에선 건강권을 새벽 배송 노동자에만 국한한 걸 두고 설득력이 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야간 노동자의 권리 보호와 노동 환경 개선이 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비단 택배 노동자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과 응급실, 운송과 정보기술(IT) 등 사회 공동체를 지탱하는 심야 노동 전반에 걸친 다양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역대 정부마다 ‘규제 개혁’을 외쳐 왔다. 더 나은 삶을 주장 하려다가 또 하나의 규제를 더 만들려는 건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 우리는 ‘천천히 서둘러라’ 라는 격언을 되새기며, 무엇이 인간의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정책결정원칙’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신중하게 판단 할 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