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민족의 정신적 안착지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은 또 다시 로마에 의하여 정복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기원 70년 로마의 티투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을 불살라버린 후 유태인을 팔레스타인에서 추방한다. 여기에서 유태민족의 기나긴 이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할 때 서쪽 성벽의 일부가 남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의 “통곡의 성벽”이며 성지 순례자들의 목적지가 되어 있다. “통곡의 성벽”이라고 일컬어지게 된 것은 그 성벽에 이슬이 맺혀있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그것은 확실치 않다. 유태민족이 바빌론에서 석방된 후 제 2의 성전을 건축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재건한다는 것은 여간 큰 역사가 아니었다. 몇 번이고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으나 느혜미아와 같은 예언자가 나타나서 민중을 격려하여 22년 만에 제 2의 성전을 왕성하게 된다. 이때 유태민족은 기쁨이 북받쳐 통곡하였으며 그 소리는 멀리 지평선 너머까지 울려 퍼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토록 제 2의 성전은 고난 속에서 재건되었으나 로마군이 이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만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통곡의 성벽”이라고 하는 제 2성전의 서쪽 성벽의 일부분이다. 이 성벽을 찾는 유태의 순례자들은 고난 속에서 성전을 재건한 조상들의 불굴의 의지를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유태민족이 한마음으로 단합하면 언젠가는 이 성벽위에 성전을 다시 재건하게 되리라는 결의를 굳게 하며 눈물을 흘리게 된다. “통곡의 성벽”은 오늘날 유태민족의 불굴의 재생을 위한 상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토록 예루살렘의 성전은 유태민족에게 정신적으로 밀착되어 있다.
오늘의 이스라엘 공화국이 탄생하기 이전에도 유태민족은 항상 팔레스타인으로 복귀하여 그 옛날 솔로몬의 성전이 있는 시온성에 그들의 조국을 재건하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1878년 소수의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 유태인 마을을 건설하였으며 1882년 동구라파의 일부 유태인이 역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서 유태인 촌락을 건설하였다. 이와 같은 산발적 복귀운동이 하나의 커다란 정치운동으로 표현된 것이 시온주의 운동이다. 마침내 1897년 데오도르 허츨의 주도하에 바슬에서 시온주의 단체가 탄생하게 된다. 이것이 현대 시온주의의 시초이며 시온에로의 본격적인 복귀운동이다. 시온주의는 유태민족의 독립운동이며 가나안 땅에 그들의 독립된 국가를 세우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시온주의 운동은 언제나 시온성을 그리며 그곳으로 복귀하려는 유태민족의 마음에 불을 질렀으며 이로 인하여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가는 유태인은 급격히 증가했다. 이 유태민족의 팔레스타인 복귀가 절정에 달한 것은 1948년 이스라엘 공화국의 수립을 계기로 해서이다. 이 운동이 오랫동안 팔레스타인지방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아랍민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된 것은 어느 면 당연한 결과이다. 유태인에게 정착지를 빼앗긴 아랍인이 팔레스타인 해방단체(PLO)를 만들어 시온주의에 저항하고 있으며 지금도 두 민족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이와 같은 저항운동을 지원해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아랍 국가들이다. 유태민족이 이민족의 박해를 받게 된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바로 그들이 표방하는 시온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시온에로의 복귀를 위한 유태민족의 집념이 그들을 단합시키는 힘이 되고 그와 같은 민족적 단합이 이민족의 질서의 대상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유태민족의 시온성에로의 복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시온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며 그 앞에는 아직도 많은 난관이 가로 놓여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유태민족은 그들 조상의 불굴의 의지와 신앙을 이어받아 오늘도 그 멀고도 험난한 시온성으로 가는 길을 끈기 있게 가고 있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