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니들, 편지 좀 해. 심심해 죽겠어. 우리 집 주소는 삽살특별시 송산구 증평동 577번지야."

딸아이가 청주에 있는 친구들에게 두타산자락에 있는 오지마을로 이사 왔다고 장난스럽게 자랑했던 마을 이름이 삽사리다. 삽살개가 많아서 삽사리냐고 물었더니 황금빛 모래가 많이 나는 고샅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삽살특별시'라고 부를 만큼 정이 듬뿍 든 이곳으로 이사 온 지도 벌써 강산이 한 번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시골 생활이 불편하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을 어른들께서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보살펴주셨다. 그래서인지 우리 부부보다 대여섯 살 많은 이장님 부부도, 여든을 넘긴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부모님처럼 느껴진다. 우리 부부는 이 마을에서 막내자식인양 응석을 부리며 산다.

출근하다 만난 샛별이 할머니께 아침 인사를 하면 "열무 속은 거 같다가 겉절이 해 묵을 겨?" 그럴 때 나는 그냥 헤, 하고 웃는다. 그러면 "그려, 바쁜 사람이 운제 혀." 하고 웃으신다. 퇴근하고 돌아와 보면 현관에 맛깔스러운 열무김치가 놓여있다.

이곳은 모든 게 공짜다. 국거리가 없으면 호미 들고 나가 냉이도 캐고, 때로는 이장님 밭두렁에 심은 호박잎과 호박도 마음껏 따다 먹는다. 이장님이 어설픈 농사꾼 흉내 내느라 힘만 쓰지 뭐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심어놓으셨다. 처음에는 염치없고 죄송스러웠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니 대놓고 도적질을 하는 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직장에서 퇴근을 하고 돌아와 보면 종종 현관 앞에 먹을거리가 놓여 있곤 하는데, 어느 날엔 호박이, 어느 날엔 함지박 가득 담긴 사과가, 어느 날엔 무가 놓여있다.우리 가족은 먹을거리를 놓고 가고, 빨래를 걷어놓고 가는 마을 분들을 우렁각시라 부른다. 옛 이야기에 나오는 우렁각시가 우리 마을에 살고 있다고 직장 동료에게 자랑을 하곤 한다.해마다 김장재료도 몽땅 공짜로 얻는다. 배추와 무는 이장님이, 마늘은 샛별이 할머니가, 고춧가루는 쌍둥이 할머니가, 참깨는 반장님이 주신다. 나는 소금만 사면된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이라기보다는 가족 같은 마을 분들의 넉넉하고 텁텁한 정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그래서인지 이곳으로 이사 오고 나서 몸무게가 10㎏이 늘었다.

우연히 지인 소개로 삽사리에 처음 왔을 때 아카시아 꽃이 하얗다 못해 출렁이는 물보라 같았다. 하얗게 흔들리는 아카시아 나무 사이로 얼핏 보이는 오솔길에 도시에서 날아온 바람이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반해버린 나는 이 마을에서 살게 될 거라고 시크릿을 했고, 그해 가을에 집을 짓고 이사를 왔다.

어제는 걸어서 퇴근을 했다. 오랜만에 두타산도 바라보고, 안재미와 송티 마을도 둘러보고, 송오리 길옆으로 흐르는 도랑도 살피며 걸었다. 딴 짓을 하는 나를 보고 울긋불긋한 가을 옷으로 갈아입은 두타산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서산으로 넘어가는 노을빛이 도랑가 마른 풀숲에 머물듯 멈칫거렸다. 손으로 훑으면 잡힐 듯해서 손을 뻗으니 어느새 감나무로 달아나 버렸다. 이제 막 영글기 시작한 감이 무안한지 발갛게 얼굴을 붉혔다.지붕이 낮은 집 굴뚝에서는 마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밥 타는 냄새,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나는 밥 타는 냄새를 맡으며 오래오래 이 마을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권영이 증평군청 기획감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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