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편> 혁명의 횃불스러지다

▲서산시 해미읍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 1894년 서산군청을 습격하고 관아를 불태우는 등 사기가 오른 동학군은 해미읍성으로 집결해 있었다. 이에 충청감사는 임천 (현 부여 임천면)군수 이두황(李斗璜)을 시켜 한밤중에 습격, 동학도들을 사살했다.


서산의 동학혁명사는 군아 점령, 해미 승전곡 전투, 해미성 전투, 매봉재(梅峴) 전투를 든다. 서산지역에서 명단으로 확인된 동학혁명군 사망자 수는 77명으로 집계되는 것으로 보면 서산 지역은 태안 지역과 함께 동학교도 활동이 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군아 점령, 군수와 이방 처형

서산에서도 태안과 같은 날인 10월 초하룻날 군아를 습격하여 군수 박정기(朴鉦基) 이방 송봉훈(宋鳳勳)을 율장촌에서 참수했다. 동학혁명군은 창고를 열어 그동안 수탈한 식량을 빈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동학혁명군은 각각 서산과 태안에서 승전하여 기세가 오르자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이 폭발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실 만으로도 당시 동학혁명군이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민심을 읽을 수 있다.

한편, 동학혁명군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을 무렵, 홍성군수 이승우가 관군과 유회군 수천 명과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30여 명까지 이끌고 10월 11일 새벽에 예산에 있는 예포 대도소를 불시에 공격했다.

▲필자가 해미읍성 아래서 비문을 살펴보고 있다.

동학혁명군은 교전할 여유도 없이 패전하여 흩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동학혁명군의 세력이 열세에 몰리자 이번에는 유회군에 가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동학교도는 물론 가족까지 무자비하게 처형하는데 앞장섰다.

이렇게0 되자 패주했던 동학혁명군이 다시 모여 이들에 싸우지 않으면 살길이 없었고, 나라는 일본의 수중에 들어갈 것이라는 위기감에 총궐기하기로 한다.

승전곡 싸움에서 倭軍상대 승리

10월 22일, 서산 태안지방의 동학혁명군이 집결하여 23일에는 해미면 귀밀리에서 진을 쳤다.

그러자 해미 지역의 동학혁명군이 합류하여 24일 오후 5시경 해미 승전곡에 이르렀을 때 미리 잠복 중이던 관군 500명, 유회군 수 천 명, 일본군 400명이 나타나 치열한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는 동학혁명사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의 승리는 유일하다. 당시 충청도 내포의 전투를 진두지휘한 대표적인 인물은 다음과 같다. 태안 김병두(金秉斗), 안면도 주병도(朱炳道), 최동빈(崔東彬), 서산 장세화(張世華), 당진 박용태(朴容台), 김현구(金顯玖), 홍성 김주열(金周烈), 한규복(韓圭復), 면천 이창구(李昌九), 남포 추용(秋鏞), 신창 김경삼(金敬三), 곽원(郭元), 정태영(丁泰榮), 덕산 이종호(李鐘浩), 최병헌(崔秉憲) 등이다.

▲서산군아 터. 당시 동학군에 의해 점령
되었다.

사기가 오른 동학혁명군은 강행군하여 25일에는 당진의 면천읍 여미평으로 이동하여 26일에는 예산 신례원 관작에 진을 치게 되는데, 당시 동학혁명군의 숫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작 전투에서 크게 이겨 기세가 등등해진 동학혁명군은 홍주성을 치기 위해 출발한다.

홍주성과 해미성 전투 패배는 동학혁명사의 분수령 홍주성에서 패배는 내포 동학혁명군의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홍성 편 참조)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동학혁명군은 11월 5일 해미성으로 들어왔으나 11월7일 새벽에 이두황은 일락치(日落峙) 쪽에서 새벽에 기습해옴에 따라 접전이 벌어진다. 천혜의 요지인 해미성에서 일진일퇴의 격전이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동학혁명군은 사상자가 속출하여 작전상 후퇴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미성 전투에서 동학혁명군은 가지고 있던 무기도 제대로 챙기지 못 한 채 도주하였다. 당시의 긴박한 정황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관군은 북쪽으로 패주하는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여 40여명을 사살하고 10여명을 생포된다. 또한 5백여 명이나 되는 다른 부대는 남쪽으로 10여리 후퇴하여 저성리(猪城里)에 집결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대오를 점검하고 있을 때 추격해온 관군과 다시 접전이 벌어졌다. 동학혁명군은다시 상황이 불리하자 매현으로 후퇴하였다.

해미성 전투 패배는 동학사 분수령

11월 8일 저녁 8시, 동학혁명군은 매현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이 때 이두황이 이끄는 관군이 또 습격했다. 습격을 받은 동학혁명군은 사력을 다하여 항전에 임했다.

이렇게 두어 시간쯤 접전이 계속되었는데, 동학혁명군 쪽의 전세가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바로 이 때 동학혁명군의 진중에서 화약이 폭발하여 천지를 진동케 하고 화약 연기가 앞을 가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피아간 모두 당황했으나, 동학혁명군은 연막을 이용하여 사방으로 도주했다.

당시 매현 전투에서 관군에게 빼앗긴 동학혁명군의 무기는 대포 1문, 천보총 7정, 조총 7정, 창 16자루, 광검(光劒) 1자루, 칼 1자루, 포란(砲卵) 1되, 쟁(錚) 4개 등이다.

서산 매현에서 패배함으로써 내포 동학의 마지막 횃불이 꺼진다. 매현 전투지는 인지면 화수리로 추정된다. 매봉재 전투에 대한 관 기록 &amp;amp;amp;amp;quot;해미에서 패한 동학군 수 백 명이 노지면 수현리에 집결했으나 패했다&amp;amp;amp;amp;quot;와 &amp;amp;amp;amp;quot;저녁 먹을 때 쯤 싸움이 시작되어 초저녁에 동학군이 완전 패했다&amp;amp;amp;amp;quot;는 두 기록이 보이는데, 당시 매봉재 싸움을 증언한 김현욱 옹(당시 84세)의 내용이 거의 일치하고 있었다.


최근 매현이 음암면 신장리라는 이견이 있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인지면 화수리 매봉재`가 맞는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를 들면, 태안 출신이 많은 동학혁명군은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 여의치 않으면 배를 타고 관군의 추적을 따돌리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고, 화수리 매봉재는 태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굳이 당진 방향인 음암면 신장리로 갔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어떻든 이 매봉재 싸움에서 해미의 동학지도자 김지희를 비롯한 다섯 명이 포로로 붙잡혀 처형 되었다.

이두황은 유회군에게 참살 임무를 맡기고 급히 공주로 회전한다. 그 뒤 서산에서는 태안과 같이 유도군의 동학 도인을 색출하여 작두 참살이라는 참혹한 피의 보복이 자행된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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