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스럽고 스산해야 할 11월이 봄처럼 따뜻하다. 꽃이 질 줄을 모르고 이미 졌던 꽃이 다시 꽃잎을 내밀었다. 발갛게 익은 홍시가 별자리로 어우러져 가을을 고집하고 있다. 그래도 나뭇잎은 울긋불긋 물들었고 은행잎이 노랗게 떨어졌다. 이상기온이어도 11월인 것이다.

계절은 마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계절이 의미는 우리 삶에 필요한 지혜이기도 하다. 24절기가 그렇다. 청명(淸明)은 삼라만상이 맑고 밝으며 화창해 나무를 심기에 적당한 시기가 되어 논밭둑을 손질하고 못자리판을 만들었다. 망종(亡種)이 일찍 들면 보리농사에 좋고 늦게 들면 나쁘다 하여 망종의 시기로 풍흉을 점쳤다. 한로(寒露)에는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여 국화전을 지져 먹고 국화술을 담갔으며 수유(茱萸)를 머리에 꽂아 잡귀를 쫓았다. 상강(霜降)이 지나면 동물들이 겨울잠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삶에 24절기가 있듯이 학교에도 계절마다 행사가 있다.

3월에 신입생을 받아들이고 1학기를 시작한다. 청명 즈음인 사오월에 체육대회와 소풍을 다녀오고 칠월은 무더운 여름방학을 준비하며 1학기의 성취도를 평가한다. 더위가 멈추고 서늘해지기 시작하여 논벼가 익는 처서(處暑) 즈음에 2학기를 시작한다. 볕이 좋아 들녘이 황금빛으로 어우러지는 시기에 가을 소풍을 다녀오고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동지(冬至) 무렵에 겨울방학식을 한다.

이처럼 학교도 계절의 지혜에 순응한다.

지난주에 고3 학생들은 대학입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일생의 중요한 징검다리를 건넜다.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고교입시 내신 성적 산출을 위해서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보았다.

성취감으로 웃는 학생이 있고 손아귀에 움켜쥘 수 있었던 것을 놓아 버렸다고 아쉬워하는 학생도 있다. 성취와 아쉬움이 점철되어 교실이 11월의 텅 빈 들판처럼 황량하기도 하다. 상급학교 입시를 위한 커다란 고지를 넘었다는 통쾌와 기쁨도 있지만 허전함과 두려움과 자괴감에 빠져 있다.

돌이켜 보면 이들은 지혜가 아닌,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편중된 지식을 얻으려 몸부림쳐야 했다. 아침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지식을 편식하며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슬기로운 삶의 지혜가 아닌, 입시를 통과하기 위한 지식을 마구잡이로 포획해야 했다.

11월에 일생의 중요한 시험을 마쳤는데 허탈하지 않을 수 없다. 추수 끝난 황량한 벌판 허수아비가 입시생의 자화상이다.



/김창식 충대부중 교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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