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서 살고 있다. 인생은 인생 자체를 이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산다. 다만 살려고 하는 의욕만을 의지하고 나는 산다. 인생의 목적은 자기 내부에 있는 가능성의 실현이다. 일체의 행위는 자기 목적적이다. 그 이외에 어느 것도 찾아서는 안 된다. 자유로운 마음으로 말이다. 나는 학문을 위해서 학문을 했다. 산에 오르기 위해서 산에 올랐으며 일하기 위해서 일을 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세월이 꽤 오래 계속됐다. 나는 산다는 것 이외의 모든 목적을 거부하며 살았다. 그러기 까지는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뭔가 막연히 다른 목적을 위해서 공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런 모든 목적을 거부했다.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그저 공부가 하고 싶어서 이다. 그 이외의 이유로 공부하는 것은 “살려고 하는 의욕”에 대한 모욕이다.

나는 많은 곳을 여행했다. 단지 여행이 좋아서 여행했다. 나는 산에 살았다. 그저 산이 좋아서 산에 살았다. 여름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그저 수영을 하고 싶어서 수영을 했던 것이다. 나의 지난날은 충실했다. 그러나 이따금 마음을 어지럽힌 것은 허무함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 “허무함...”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나로서 보면 땀투성이가 되고 피투성이가 되어 도달한 인생론이다. 괴로워서 몸부림을 쳤던 날을 거쳐서 깨달은 것이었다. 광기(狂氣)와의 접점(接點)의 위험마저도 범하면서 잡은 것이었다. “진실을 직시(直視)하고 그리고 웃는 것이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마음이 공부하고 있을 때 무언가 다른 목적을 바라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하고 있을 때 잠깐 쉬면서 나는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할까 생각했을 때 나는 공부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역시 허무했다.

인생은 짧다. 고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자신이었는데 역시 이렇게 공부하고 일을 하고 그리고 역시 죽어가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니 허무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를 모르는 이상, 그리고 확실한 것은 살려고 하는 자기뿐인 이상, 그리고 그래서 허무한 이상, 이미 이 허무함에서 구제 받을 것은 신앙 이외에는 없지 않을까 생각하고 생각했다.

인생에 의문이 생기는 것은 생명이 완전히 활동하지 않는 때이다.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생명의 활동에 어딘가 장해(障害)가 있는 것이다. 충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과 공부에 열중해 보았다. “차분하게 자고 있을 수가 없기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일어나면 그저 일어나 있을 수가 없기에 걷는다고 합니다. 걸으면 그저 걷고 있을 수가 없기에 뛴다고 합니다. 이미 뛰기 시작한 이상 어디에서도 설 수가 없다고 합니다. 멈출 수 없는 것 만이라면 좋겠지만 갈수록 속력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 나스메세끼의 작품 “行人”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쩌면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보다 충실하려고 생각하고 몸부림쳤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결국 인간에게는 최후에는 구원이 신앙 이외에는 찾을 수 없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을 때 인간의 무력(無力)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러나 신앙은 나의 생각에는 도피해서 구원을 찾는 것인 이상 마음의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한 신앙에 의해 마음의 허무함의 소리를 누를 수는 있어도 그 소리는 결코 꺼져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르면서 끊임없이 마음을 뒤에서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도피하는 장소는 아니다. 믿지 않을 수 없어 믿는 것이다. 허무해서 그것으로부터 피하고 싶어서 믿으려고 하는 神은 진짜가 아니다. 바야흐로 나는 신앙으로 도피하려했다.

위대한 철학자도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나도 끝내는 신앙으로 도피하려고 하고 있다. 도피해서는 안 된다. 도피할까 보냐고 나는 힘을 냈다. 인간으로서의 최후의 투쟁은 니힐리즘과의 투쟁인지도 모른다. 나는 니힐이나 공허함과 철저하게 싸워 주리라고 결심했다. 공허함과의 싸움이 인간으로서의 최후의 싸움으로 싸우려고 했다.산에 오르고 싶으니까 오른다.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한다. 살고 싶어서 살고 있다. 이 목적 이외의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패배이다. 일을 하고 싶기에 일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인생을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하고 싶다는 희망 때문에 신앙으로 도피한다고 하는 속임수를 쓰고 싶지 않았다. 납득할 수 있는 무언가를 이 “살려고 하는 의욕”에 연결시키고 싶다.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