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로제 환자는 자기가 하지 않는 것의 책임을 무언가 자기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전가시키려 한다. 일을 부탁받더라도 갑자기 두통이 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일을 하기가 싫은 것이다. 병석에 누우면 부탁받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두통이 생긴다. 현대의 무기력도 대개 이런 것이다.

무기력이라고 하는 뜨뜻미지근한 온수에 잠겨서 기분 좋게 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무기력의 푹신한 자리에서 그 무기력의 원인을 모두 현대사회 속에서 찾고 만다. 자기가 나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나쁜 것이다. 자기의 책임이 아니다. 사회의 책임인 것이다 라고 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미지근한 목욕탕 속에서 흐느적거리며 산 것은 죽은 것 같은 상태에 있다.

당당하게 사회 속에 알몸으로 돌입해서 거기에서 생기는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색은 어디에도 없다. 시험점수가 나쁠 때 그것을 시험문제가 나쁜 것으로 해서 자기가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의 책임을 지지 않는 학생과 같은 것이다.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쁘다. 나쁘다고 고함치며 선생에게 따지고 든다면 차라리 낫겠다. 그러나 결코 그런 흉내는 내지 못한다. 또한 시험 따위는 문제로 삼지 않는 것이라면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뒤에 가서 소곤소곤 핑계를 대곤 한다. 현대의 무기력한 사람이 하고 있는 흉내는 바로 이런 것이다. 모든 것에 대해서 “타인이 자기를 나쁘게 하기 때문이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참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열등감은 없을 텐데 마음속으로는 참다운 것을 알고 있어서 열등감을 갖거나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사람들 앞에 나가기가 무섭다고 하는 공포증에 걸린 신경병의 아가씨는 가정이란 조그만 세계에서의 특별 취급 속에서 언제까지나 앉아 있으려고 한다. 자기가 공포증이라는 것으로 특별 취급되어 그 가정 안에 있는 것으로 시련을 피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무언가 형편이 좋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인간은 병(病)에 걸리고 싶다. 걸리고 싶다고 생각해서 끝내는 정말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거나 일어설 수 없게 되거나 손이 움직이지 않거나 한다. 모두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 나가기가 무섭다고 하는 공포증에 걸린 신경병의 아가씨는 가정이란 조그만 세계에서의 특별취급 속에서 언제까지나 앉아 있으려고 한다. 자기가 공포증이라는 것으로 특별 취급되어 그 가정 안에 있는 것으로 시련을 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아가씨는 어찌 될 것인가. 모든 시련을 피할 수는 있으나 결국은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현대문명이든, 노이로제이든, 실연이든, 위험이든, 남이 싫어하든, 배신이든, 무엇이든 오라! 그렇게 외치며 고쳐 앉아 “마음먹었으면 목숨을 걸고”라고 하면서 인생에 정면으로 맞서든가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인생을 마치든가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도피할 것인가, 돌진할 것인가.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도망갈까, 싸울까”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이다.

어느 부부가 가난하게 됐다고 하자. 그럴 때 이 가난이란 것이 두 사람을 보다 굳게 단합시키는 경우와 두 사람을 헤어지게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도피하는”자세의 인간은 가난 속에서 부부간에 사이가 틀어져 헤어진다. “싸우는”자세의 인간은 서로 이제까지 보다 한층 더 사랑하게 된다. 같은 가난이 전혀 반대로 작용하는 것이다. 곤란에 직면한 연인을 버리고 가는 사람, 곤란에 직면한 연인과 함께 싸우려는 사람, 문제는 그것뿐이다. 입으로는 현대 교육을 받은 사람은 그런 때에 결코 연인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버린다. 그것이 현실인 것이다. 현대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문화인류학이 한데 어울려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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