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관객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으면 연극을 계속한다. 그리고 혼자만 남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쉰다.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옷을 벗고 가벼운 마음이 되는 것처럼 모든 욕망을 누르고 또 누르며 현대인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살려고 애쓴다. 주인공이든, 조연이든, 선한 역이든, 악한 역이든 맡은 역을 충실히 해내려고 애를 쓴다. 물론 때로는 지나치게 억압을 해서 그 욕망이 폭발하는 일이 있다. 예를 들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은 평소에는 조용하고 온순한 사람이 많아 성적(性的)으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무관심한 체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들로부터 징그럽다고 생각되는 것이 무서워서 무관심한 체하는 사람인 것이다. 욕망을 억압할 수는 있지만 없앨 수는 없다. 억압된 욕망은 언제나 커다란 압력을 갖고 그 사람에게 압력을 가한다. 그 긴장 때문에 그 사람은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19세기는 이성을 굳게 믿던 시대였다. 인간의 이성은 어느 것보다도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자연에 대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환상은 공해(公害) 때문에 깨져버렸었다. 또한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충동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환상을 파괴한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에 의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간은 사회적 상식의 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인간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사회적 승인을 필요로 하는 동물인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들은 손님의 비위를 맞추는 바의 호스티스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여자아이가 권위주의적인 어버이의 완전한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부모가 어떤 말을 하던 한번도 거역하지 않았다. 권위주의적인 부모는 “아마 이렇게 얌전한 애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온순한 여자애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라고 자랑했다. 그녀는 선생의 말에도 무조건 따랐다. 이 온순한 여자가 언젠가 사랑을 했다. 어느 날 그녀는 애인과 함께 옷을 사려고 상점에 갔다. 상점에서 그녀는 애인과 함께 옷을 고르고 있었다. 애인은 그녀에게 노란 옷을 권했다. 그때 그녀는 하얀 옷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는 노란 옷을 들고 있는 애인을 향해 미친 듯이 외쳤다. “나는 죽어도 그런 옷은 안 입어요. 이 하얀 옷을 입을 거예요.” 지금까지 억압하고 억압하던 것이 마침내 억압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한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리 흰옷을 입고 싶더라도 그녀는 반드시 노란 옷을 입었던 것이다. 그 욕구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그 후로 그녀는 어떻게 살았는가? 그녀는 다시 “착한 애”로 되돌아갔다. 그녀에게는 역시 “착한 애”로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살기 쉬웠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녀가 이때를 계기로 두려움 없이 자기를 추구했다면 그녀는 자기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본성을 자기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라서 반사회적임을 알고 그녀는 전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전율하는 감정과 함께 그녀는 참된 자기를 찾으려고 하는 매우 감동적인 체험도 동시에 했던 것이다.
우리가 나는 이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참된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가 그랬으면 하고 바라고 있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의 소망의 표현이다. 자기에 대하여 자기를 속이는 이상 자신의 존재감(存在感)을 확인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