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마음을 배려하고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전혀 뜻이 없는 예의를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현대인은 형식적으로 어떤 집단에 속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어떤 집단에 속할 수 있는 최후의 양식(樣式)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타인에게 수용되므로서 개인의 불안이 해소될 리는 없지만 역시 잃어버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불안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본질적인 마음의 연결이 없는 한 또한 자기와 집단의 일체성(一体性)이 실현되지 않는 한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쨌든 표면적으로라도 남들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안정될 수 있고 기분도 좋아진다. 그럴수록 우리는 오른쪽을 보거나, 왼쪽을 보거나, 어떻게 하면 남에게 미움을 받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남에게 호감을 살까 하고 생각하며 초조해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불안을 얼버무리고 싶은 것이다.
팽대(膨大)한 관리사회가 성립되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는 문화적 목표가 달성되지 못하고 제도적 규범에 충실한 것만이 사회에서 생활해 나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이런 본심과 원칙의 무서울 정도의 괴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또한 사회의 보수성은 도저히 타파(打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예의범절에 관한 책이 왜 그토록 많이 팔리는가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예의범절의 책은 어디까지나 제도적 규범에 충실한 방법을 쓴 것이다. 예의범절을 타파해도 그 사회적 지위가 까딱도 하지 않는다는 인간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질적 업적을 이룩한 소수의 사람뿐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면 예의범절의 책은 그것을 읽는 사람에 있어서는 이미 살기위해 필요한 지식인 것이다. 업적에 따라 신변의 안전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예의바르다는 것에 의해 몸의 안전이 지켜지는 것이다. 각 개인에 있어서 “반드시 되어야 하는 것”은 “상대가 바라는 인간”으로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인간은 “상품”으로 변한다. 상품은 어디까지나 사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사람이 싫어하는 상품은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사람의 요망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참으로 인간이 이런 상품으로 전락해버린 것이 이 현대의 대중사회가 아닐까?
실적에 의해 지위가 안정된 인간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언제나 걱정 없다. 그러나 제도적 규범에 충실하다는 것으로만 지위를 얻은 자는 당연히 보수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증오할 정도의 보수성은 상당한 심리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도 나는 역시 다음 세대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