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청기행 -26 정지용 생가
郡, 문학관 짓고 해마다 문학상 시상
고인 시세계 기리는 문인들 발길 북적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정지용 향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6 제 고향 전하지 않고/ 머언 항구(港口)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냐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푸르구나 -정지용 고향
정지용 시인의 대표적인 시 '향수'다. 이 시는 노래 가사로 인용돼 더욱 유명해졌지만 고향을 그리는 서정적인 시어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꾸밈없는 삶의 표현, 자연과의 동화된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5월 15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에서 출생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 홍사용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냈다.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3·1 운동 당시에는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다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1923년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1926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동시 귀국하여 8·15 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다.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정지용의 시단 활동은 김영랑과 박용철을 만나 시문학 동인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때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문장'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등 우리나라 대표적인 시인들을 등단시키기도 했다.
일제의 소개령에 의해 3년간 현재의 부천시인 소사에 거주하며 부천의 천주교 발전에도 공헌했다.
1943년 가족과 함께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로 이주했으며 소사성당을 개설하여 첫 미사를 가졌다.
1945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다 한국전쟁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이때 월북했다 하여 월북작가로 낙인이 찍혔으며 이 때문에 그의 문학은 한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24회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해금이 되었으며 이후 그의 시가 우리 문단에 다시 등장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해금과 동시에 그의 생가가 헐린 자리에 세워진 집의 벽에 정지용 생가라는 표지가 붙었고 '시인 정지용 흉상제막 기념공연'이 있었다.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기념 공연에는 이동원, 박인수가 '향수'를 불러 온 국민을 매료시켰다.
그는 시집으로 '정지용시집' 시문학사(1935), '백록담' 문장사(1941), '지용시선' 을유문화사(1946) 등을 펴냈으며 '지용문학독본' 박문출판사(1949), '산문' 동지사(1949) 등의 산문을 출간하기도 했다.
1993년에 정지용이 살았던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소사본2동 건물에 "여기는 한국 현대시의 큰 별인 정지용 선생이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약 3년 반 동안 은거하면서 시심을 키우던 곳입니다."라는 내용의 기념 표지를 세웠으며 2000년에는 부천시가 '고향' 시비를 부천중앙공원에 세웠다.
정지용 시인이 태어난 옥천군에서는 이보다 앞서 1988년 부터 매년 5월 지용문학제를 거행하고 있다.
또지용문학상을 시상하기도 한다.
2005년 5월에는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지용 생가 옆에 지용문학관을 건립하여 매년 많은 문인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지용문학관에는 전시 영상실과 창작문학 교실, 시낭송실 등을 갖춰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정지용 시인의 시를 읽고 그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향수'에 등장하는 실개천과 돌다리 등도 다시 만들어졌으며 그가 살았던 초가집은 원형 그대로 복원됐다.
집 앞에는 시비와 흉상도 세워졌다.
그의 생가 툇마루에 걸터앉으면 고향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을것 같은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시인이 아니어도 저절로 향수와 같은 시심에 젖게 되며 고향 그리운 노래 한귀절이라도 불려질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당에 비교적 큰 우물이 눈에 들어오고 장독대와 감나무도 보인다.
안채와 헛간이 있고 생가 벽에는 시들이 걸려 있다.
아버지가 한약방을 운영하여 약상자도 방안에 정리돼 있다.
생가의 모습은 소박하여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옛모습 그대로를 보는것 같다. /글·사진=조무주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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