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유동에 가면 '국립 4·19 민주묘지'가 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희생 당한 영령 321기가 모셔져 있다. 1961년 공원묘지로 출발, 서울시의 관리를 받다가 1993년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5년 국가보훈처로 관리가 이관돼 이 때부터 국립묘지가 됐다.321기 가운데 52년 전인 그날 고귀한 목숨을 잃은 영령이 186기다. 이 가운데 95기가 당시 학생 신분이었다. 대학생이 25명이고 고등학생이 43명으로 가장 많다. 꽃망울을 미처 터뜨리지 못한 중학생 20명과 초등학생 7명도 있다.

-거리로 뛰쳐나간 초등학생

희생자 중 가장 어린 영령이 당시 10살이었다. 10살이면 지금의 초등학교 3∼4학년이다. 초등학교 3∼4학년이면 어떤 때일까. 지금의 또래들을 놓고 볼 때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이 학원, 저 학원을 순례하다 부모의 눈을 피해 PC방에서 시간을 보낼 때다. 컴퓨터 게임에 빠져 한 번 의자에 앉으면 누가 아는 척 하기 전에 알아서 궁둥이를 떼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들 때다. 단어 하나, 공식 하나 더 외우는데 바쁘고 옆 친구의 어려움은 몰라도 한참 뜨는 연예인, 잘 나가는 스포츠 스타들의 신상 명세는 달달 외고 다닐 때가 역시 그 때쯤이다.그러니 이런 그들에게 "어린 우리 눈으로 봐도 어른들이 잘못한다"며 52년 전 그들처럼 거리로 뛰쳐나가면서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펼 수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것 아니냐는 게 요즘의 3∼4학년 또래들을 바라보는 시각이다.1960년 그 날 학생들은 불의에 맞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초석 역할을 했다. 순수한 그들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당시 기성세대들도 민초들이 죽지않았음을 보여줬다.윤석연 씨가 펴 낸 '4·19혁명'에는 기막힌 사연들이 실려있다. 당시 여중 2학년이던 한 희생자는 홀어머니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써놓고 나왔다.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제가 아직 철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은 알고있습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 없습니다'는 절절한 심정을 남겼다. 이게 유서가 됐다.

초등학생의 시는 더 애잔하다. '오빠와 언니는 왜 총에 맞나요? 외로이 남은 책가방이 무겁기도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엄마, 아빠가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리는지를.'이 초등학생들은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下野) 하기에 앞서 19일 친구가 시위대에게 박수치다가 총에 맞아 죽자 '국군 아저씨들은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마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대에 끼었다.이렇게 학생들은 우리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길잡이를 했다. 3·1운동의 시발점이 된 1919년 2·8독립선언이 그랬고, 1929년 11월3일의 광주학생운동과 1941년 대구학생운동 등이 그렇다. 위의 윤 씨는 '푸른 영혼들의 열정'이라고 표현했다.

- 역사의 고비마다 길잡이

요즘 학생들보고 50여 년 전 또래보다 머리가 틔었다고 한다. 컴퓨터를 전문가 뺨치게 다루고, 외국어도 잘 한다. 보다 서구화·선진화 됐다. 그렇지만 감성·정신 연령은 오히려 뒤쳐진다는 평이다. 반면 자극적인 것을 좆는 건 보다 앞선다는 얘기를 듣는다.몸만 비대해졌다는 비아냥 소리도 나온다. 그래도 자신만의 독특한 '끼'로 세계에 우뚝 서는 모습을 보면 괜한 걱정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칠 있으면 치러지는 19대 총선으로 어딜가나 선거 얘기로 시끌시끌하다. 곧 이어 '그날'이 돌아온다. 선거판을 벗어나 잠시 '4·19 키드'와 '디지털 키드'를 생각해봤다.



/박광호·세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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