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에서 친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친구를 잘못 사귄 것이 화근이 되어 크나큰 손실을 보게 되거나 범죄의 소굴에 빠지게 되는 경우를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반대로 좋은 친구를 가진 것이 도움이 되어 곤궁한 역경에서 벗어나거나 또 친구로부터 자극을 받아 학업에 전념하게 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와 같이 전통적으로 인간관계 중심의 사회에서는 특히 좋은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사업을 하거나 사회적 활동을 함에 있어서 친구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어떤 재벌이 아들을 대학에 보낸 다음 아들에게 간곡히 이르기를 “대학에 가면 공부를 하는 것보다도 친구를 사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친구를 사귀는 일은 여러 면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가정에서 친구를 사귀는 일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할 것은 당연하다.

유태의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친구를 사귀는 일을 신중하게 다루고 그것을 지도하는 것을 부모의 의무로 생각한다. 유태의 부모들이 교우관계를 지도할 때에 지표가 되는 것은 “머리를 써서 살아라.”의 격언이다. “친구를 사귈 때는 계단을 한단 올라서서 찾아라.”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반드시 머리가 좋거나 공부를 잘 하는 사람하고만 교우관계를 맺으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든지 자기의 향상을 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사귀라는 뜻이다. 물론 머리가 좋거나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해당이 되고 운동을 잘하거나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무엇이거나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친구와 사귀도록 지도한다. 그래야만이 친구관계를 통해서 향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배드민턴을 처음 배울 때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배드민턴 실력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은 초심자와 대전하기를 무척 기피한다. 초심자와 경기를 하거나 연습을 하면 재미도 없지만 실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을 원하게 된다. 친구를 사귀는 일도 아마 이 경우와 흡사하다고 할 것이다. 유태의 가정에서는 자녀가 친구를 사귈 때에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심사를 한다. 물론 취직 시험 때 치르는 면접시험과 같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나, 대개의 경우 처음 사귀는 친구를 집에 데려오도록 한다. 생일 파티에 초대하거나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때에 그 친구는 부모에게 인사를 하게 되고 심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만일 그 친구와 교분을 맺거나 함께 노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그와 같은 부모의 의사를 즉각적으로 자녀에게 전한다. “그 애는 너에게 어떤 발전을 가져올 만한 친구가 되지 못한다.”, “너를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줄 만한 다른 친구를 찾도록 해라.”는 등의 말로써 교우관계를 지도한다. 그리고 친구와 교우관계를 맺으면 끝까지 지속하도록 지도한다. “탈무드”에 “애매한 친구가 되기보다는 뚜렷한 적이 되라.”는 말이 있듯이 일단 사귄 친구와는 보다 깊이 있는 관계를 유지하도록 한다.

이 점은 한국 사람의 경우와 유사하다. 우리의 인간관계에는 어떤 사회학자가 지적했듯이 표피적 관계(表皮的關係)가 아니라 심층적 관계(深層的關係)의 특징이 있다. 친구를 처음 사귈 때는 힘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일단 교우관계를 맺으면 깊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서양 사람의 경우는 표피적 관계가 많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고 스마일을 잘하지만 실상 마음속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처음에 무뚝뚝하고 붙임성이 없지만 일단 가깝게 느껴지면 마음의 문을 열고 마음속 깊숙이 있는 이야기까지 하게 된다. 이점에서 유태인의 인간관계는 다분히 동양적인 면을 지닌다. 많은 수의 친구를 사귀도록 지도하기보다는 적은 수의 친구이지만 깊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한다. 그리고 친구의 선택에 있어서 부모의 판단이나 의견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도 지적할 만하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