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때 미군, 피난민 300∼400명 학살
'인권·평화 성지' 각광 … 매년 추모·시상식도

(28) 영동 노근리

[충청일보]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25일 부터 29일까지 5일간에 걸쳐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 쌍굴다리 밑에서 일어났다. 당시 미군은 기관총 사격으로 피난민들을 무자비하게 희생시켰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미군이 죄없는 양민을 사살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아직도 미군은 이에대한 정확한 현황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 사건이후 전국에서 비슷한 사례가 많이 보고 되었지만 사장되었다.

한국전쟁 발발후 대전이 함락된후인 1950년 7월 23일 미군이 영동읍 주곡리 마을을 찾아와 피난을 가라고 소개령을 내렸다. 주곡리 주민들은 임계리로 옮겼으며 임계리에는 이미 수백명의 피난민이 있었다. 임계리에 있던 피난민들을 미군들은 4∼5㎞ 떨어진 하가리까지 이끌고 갔다. 한밤중이 돼서야 피난주민들은 하가리에 도착했다. 아침이 되었을 때 미군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 대구쪽으로 가는 국도로 따라 피난을 계속하였다.

피난민들이 서송원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미군들이 나타나 피난민의 길을 막고 경부선 철도 위로 올라가게 했다. 피난민들은 철도를 따라 노근리 지역까지 갔다. 그곳에서 소지품 검사를 했으며 위험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때 미 전투기 2대가 폭탄을 쏟아 붙고 기총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수많은 피닌민들이 죽어 나갔다.

살아남은 피난민들이 노근리 쌍굴다리 아래로 피신했다. 그런데 이곳에 숨어있던 양민을 향해 미군은 기관총을 난사했으며 이 사건으로 300∼400명이 사살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비무장 양민을 향해 왜 기관총을 난사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미군은 밝히지 않고 있다.

미군이 총을 난사할 즈음 젊은 청장년들은 도망하여 희생을 줄여지만 아녀자와 노인들은 그대로 총을 맞아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당시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한 정은용씨가 소설로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후 AP통신이 이 사건을 보도했으며 한국정부가 진상 조사에 나서 정식 신고된 사상자 숫자가 248명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노근리사건 조사반의 보고서에 의하면 살해된 피난민중 83%가 부녀자와 노약자인 것으로 확인됐다.

▲ 노근리 쌍굴다리에는 아직도 총탄자국이 선명하다. 지난해 영동군은 쌍굴다리 복원공사를 실시했다.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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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정부는 1999년 진상조사를 실시했고, 지난 2001년 1월 미 클린턴 대통령이 유감 표명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2004년 2월 노근리사건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노근리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이 특별법에 근거하여 '노근리 평화공원'이 건립됐다. 노근리 평화공원은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공간과, 과거 성찰과 반성의 공간, 과거 현재 미래가 어우러지는 평화와 인권을 학습하는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평화공원은 인권과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의 성지로 자리매김 하고 있으며 매년 수많은 추모객들이 찾아 온다. 이 공원은 노근리사건특별법 제3조 3항에 의거하여 건립돼 희생자를 위령하며 인권 및 평화를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AP통신은 이 보도로 퓰리처상과 탐사보도상을 받았다. AP 보도후 미국의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지 등 유력 신문들과 국내 신문들이 이 사건을 주요 뉴스로 다뤘으며 미국 ABC, NBC, 영국의 BBC, 독일 공영방송 ARD 등 해외 방송사가 노근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2008년부터 '노근리 평화상'도 제정돼 수상하고 있으며 매년 인권분야, 언론분야, 문학분야 등 3개 분야에서 인권신장 및 평화 증진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 시상하고 있다. 언론상은 언론보도를 통해 인권신장과 평화 증진에 기여한 사람, 문학상은 인권의 소중함을 주제로 한 완성도 높은 소설작품을 발표한 소설가 등이다. 상금은 각 부문에 1000만원씩 3000만원에 달한다.

경부선 철도 밑 쌍굴다리에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기관총 난사 자국이 벽면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생존자인 양해찬씨에 따르면 철길 위에서 폭격기가 기총소사를 했으며 쌍굴다리 아래로 숨자 이곳을 향해 또 기관총을 난사했다고 주장했다. 양씨는 총탄을 피해 시신을 뒤집어쓰고 숨었으며 피가 시냇물에 시뻘겋게 흘러내렸다고 증언했다. 일부가 굴다리 밖으로 뛰쳐 나갔지만 곧바로 사살됐다고 전했다. 미군들은 굴다리 인근 야산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터널 안쪽은 물론이고 대피하기 위해 뛰쳐나오는 피란민들에게도 무차별로 총탄을 퍼부었다. 피난민은 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양민이었다. 또 대부분이 부녀자와 노약자였다. 아무런 무기도 없는 이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것이다. 생존자들은 지금도 왜 미군이 피난민을 향해 총을 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비극이 다시는 한반도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글·사진=조무주 대기자
▲ 노근리 평화공원에 설치된 피난민 조각상.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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