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을 보면 연꽃은 아름다운 들판에 피는 것도 아니며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나 그 꽃은 더 없이 아름답고 흙탕물이 꽃이나 연잎에도 때 묻지 않으며 연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긴다하여 방화즉과(放花卽果)라 하니 이는 원래 부처와 중생(衆生)이 둘이 아니며 중생 속에 부처의 씨가 이미 잉태(孕胎)하고 있다는 것을 말함이니 어떻게 연꽃을 하찮게 보리요.

원래 선악(善惡)이니 더러우니 깨끗한 것이 초월하고 보면 오직 삼계(三界)가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며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반야심경에 부증불감(不增不減)에서 우리는 생각나는 것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음력 팔월 보름만 같아라.”는 말이 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신선한 가을 기후도 좋으려니와 그보다 옛 조상들이 굶주리다 수확기인 가을이 더 없이 좋고 배부른 계절이기에 그와 같이 노래하였을 것이며 불교에서 말하는 부증불감은 부질없는 자기를 버리고 참다운 나(我)를 깨닫고 보면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가장 수평(水平)적이며 평등(平等)하며 평화롭고 대자유(大自由)의 경지가 바로 부증불감이며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고 없는데 뭣을 더하고 덜하고 하는 것이 없으며 먹고 입고 사는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살고 있는 그대로의 자세에서 마음을 깨닫고 보면 뭣을 더하고 덜할 것이 없는 것이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고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은 오히려 가난하고, 부정과 부패로 치부하는 자가 득세하는 세상에는 상당한 갈등이 생기며 사회가 요란하고 어지러우나 거기에 상관없이 그저 꿋꿋하게 살면서 깨달으며 그것이 수행하는 자세이며 행복한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요컨대 신체 생명 등의 생사(生死), 국토의 깨끗하고 더러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증감(增減)등을 한 눈으로 볼 때 각자 구별과 차별상(差別相)을 나타내며 그것들이 큰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가상(假相)에 마음을 빼앗겨 시달릴 때 온 세상 우주까지도 고(苦)의 세상이 되고 눈물과 원한의 세계 지옥과 같은 세상으로 화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데 이는 그 어떤 세상의 죄도 아니요, 국토의 죄도 아니요, 인생의 죄도 아니요 다만 각자가 가상(假相)에 집착하여 철저히 실상(實相)이라는 것을 간파(看破)하지 못하는 데에 그 죄가 있으며 반야(般若)라는 지혜의 힘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며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관찰(觀察)하고 보면 이 인생은 괴로운 고통의 세상도 눈물의 세상도 아니며 알고 보면 대지혜(大智慧)의 즉 반야(般若)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혜의 세상은 괴로움도 고통도 없으며 더하고 덜 하는 것도 없는 이른바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해중(奚仲)이라는 사람이 처음 수레(車)를 연구한 사람으로 수레의 바퀴를 먼저 연구하여 수레 백대를 한꺼번에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바퀴는 분명 둥근 공(空)이었다. 그러나 공(空) 자체로 굴러 갈 수 없어 연구 끝에 자전거 바퀴 모양 “살”을 박았다. 수레바퀴는 각이 진 사각이나 삼각으로는 굴릴 수 없으며 둥근 공이라야 하여 거기에 살을 박지 않으면 안 되니 살은 곧 색(色)이요, 공은 공(空)이다. 평평한 땅이나 험한 산길을 달려도 그 모양새는 공으로 변함없으니 바퀴는 반드시 살을 박아야 움직인다는 것을 해중은 연구하였으며 물론 당기고 미는 “힘”은 공기라는 것, 그리고 인연(因緣)이라는 힘을 더욱 연구하였을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제법(諸法)은 있는 그대로가 공상(空相)이며 진공실상(眞空實相)이라는 것이다.

인연 따라 생겨나는 “제법(諸法)”은 실로 천차만별(千差萬別)이며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상을 나타내고 있지만 실은 있는 그대로가 무자성(無自性) 즉, 자성이 없는 것이며 무자성이기에 진공(眞空)이라는 것이며 그 진공의 실상(實相)을 가리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하였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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